▲ 사진출처 | Washington Post
미국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 클린턴)의 승리가 당연시되는 분위기다. 한동안 이메일 스캔들과 건강 문제로 곤욕을 치른 클린턴이 대선 토론에서 트럼프를 제치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면서 승기를 잡았다. 하지만, 클린턴이 국무장관에 재임하던 시절 개인 계정의 이메일로 공적 업무를 처리한 것이 드러나면서 공화당과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이메일 스캔들은 현재 진행 중이고, 클린턴이 당선되면 집권 초기에 그의 발목을 잡을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의 기세도 무섭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John Trump, 트럼프)가 클린턴을 4%p 차로 따라잡았고(3일, Real Clear Politics), FBI가 클린턴의 이메일 스캔들을 재수사하겠다고 나서 논란이 재점화되는 모양새다. 하지만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예비선거에서 이미 25%가 선거를 마친 상태라 클린턴의 이메일 스캔들은 더 이상 유효한 변수가 될 수 없다. 공화당 역시 여론을 의식해 트럼프에게 ‘거리 두기’를 하고 있다. 이번 대선은 버리고 곧 있을 상·하원 선거에 집중하겠다는 전략이다. 사실상 트럼프는 공화당에게 있어 버린 카드다.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하면 클린턴의 승률은 90%를 넘긴다는 것이 세간의 평이다. 트럼프는 지는 게임을 하고 있다.
 
트럼프는 아까운 패배를 할 것이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그 존재만으로 미국 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 기성 정치인들과 달리 반엘리트주의의 대표자로 미국 국민 절반에 가까운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는 이민자,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향한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그의 막말은 불문율처럼 여겨졌던 정치적 올바름을 깨뜨렸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의 사전적 의미는 인종·민족·종교·성차별 등의 편견이 포함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사람을 비꼴 때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정치적 올바름을 거스르는 그의 언어는 지지층 결집에 큰 역할을 했고, 그를 공화당 대선 주자의 자리에 올려놨다.
 
막말의 승리자, 트럼프
트럼프의 막말은 오히려 그의 경쟁력이 됐다. 위선으로 비치던 정치적 올바름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트럼프는 멕시코 이민자들을 모두 성폭행범, 범죄자로 매도했고, 테러리스트인 무슬림의 입국을 전면적으로 금지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의 막말은 상식의 범위를 벗어났다. 기존 정치인들은 그를 비난했고 무시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전문가들은 트럼프의 막말이 그의 선전에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고 입을 모은다. 트럼프의 주요 지지층은 교육수준이 높지 않고 시골에 거주하는 ‘백인 노동자 계층’이다. 손병권(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는 “역설적이게도 트럼프가 막말을 하지 않았다면 공화당 후보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트럼프가 뱉은 막말은 그의 지지율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막말 이후 지지율이 반등하는 현상을 보이기도 했다.
 
트럼프가 부상한 데는 대놓고 말하는 그의 화법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사회에 만연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인종차별주의’와 ‘백인우월주의’를 거리낌 없이 말했다. 김평호(단국대 언론영상학부) 교수는 “산업시설의 외국 이주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백인 노동자들은 이민자에게 본인의 일자리를 뺏기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그런 그들에게 FTA 등의 무역 협정을 재검토한다며 보호무역주의를 주창하고 이민자를 배척하는 고립주의를 내세운 트럼프의 정책 기조는 유효하게 작용했다. 김 교수는 “오바마 행정부 8년간 소수자의 권익은 비약적으로 증대됐지만, 경제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며 “실업, 소득감소로 인한 하층 백인 노동자들의 불만이 트럼프의 지지로 나타난 것으로 풀이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정치적 올바름을 깨뜨리지 않았다. 사실을 교묘히 감추고 대중을 감정적으로 선동하기 위한 수단으로 위선자들을 비난했다.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노동자 계층이 붕괴한 것이 멕시코인을 비롯한 해외 이민자 때문은 아니다. 김준형(한동대 국제어문학부) 교수는 “위선을 깨뜨리는 정치적 올바름과는 별개로, 그의 말이 실제 사실이 맞는지 구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중산층의 붕괴가 트럼프를 만들어
트럼프의 막말이 유의미했던 것은 기성정치에 대한 대중의 실망이 도를 넘었기 때문이다. 트럼프나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 샌더스)와 같은 정치인의 등장은 기성정치에 대한 반발의 산물이다. 미국 내의 빈부격차가 확대됨에 따라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도 커졌다. 부자는 거부가 되고 빈자는 거지가 되는 상황 속에서 중산층은 붕괴했다. 이런 상황에서 말만 번지르르하게 늘어놓고 실천하지 않는 기성정치에 국민들은 실망했고 새로운 대안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높아졌다. 
 
절반의 미국 국민들은 트럼프와 샌더스라는 새로운 정치적 대안 중에서 트럼프를 선택했다.  미국 정치사의 오래된 주제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행복한 결합방식은 무엇인가’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은 돈과 힘의 제국으로 전락했고, 이런 고민은 미국 정치 무대에서 사실상 사라졌다. 대신 누가 더 자극적으로 선동해 표를 얻는가가 중요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샌더스는 패배했다. 하상응(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자본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자본의 파시즘 체제는 공고화 과정에 들어갔고, 그 천박함의 표현이 트럼프”라며 “트럼프는 미국 정치사의 타락과 비극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전문가들은 미국의 트럼프 현상이 다른 나라의 이야기만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우리의 정치 상황 역시 비극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꼽은 두 나라의 공통점은 ‘중산층 붕괴’와 ‘정치 혐오가 만연한 현실’이다. 김준형 교수는 “지금의 미국과 한국, 트럼프와 최순실은 선후관계와 양태만 다를 뿐 닮은 점이 많다”며 “사회 시스템이 붕괴하면서 어떤 정치인도 믿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선동가나 주술가가 허무에 빠진 사람들과 사회를 비이성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