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둘이었는데 간밤 한 명이 세상을 떠나…(중략)…먼지와 실오라기, 살비듬, 은빛 머리카락들을 손바닥 아래로 모아 뭉치던 그녀는 나직이, 중얼거린다. 여기 한 명이 더 살아 있다…

김숨의 소설 <한 명>의 첫 부분이다. 소설은 세월이 흘러 생존해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단 한 명뿐인 그 어느 날을 시점으로 한다. 2002년 134명이던 생존자는 2016년 7월 40명으로 줄었다. 실제로 생존자가 단 한 명 남게 됐을 때, 우리는 떳떳하게 그분을 마주할 수 있을까.

‘위안부’ 합의 그로부터 10개월
2014년 4월부터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12차례에 걸쳐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국장급 협의를 진행했다. 이후 2015년 12월 28일 양국 간에 ‘위안부’ 합의가 체결됐다. 그리고 합의 이후 10개월이 지났다.

2016년 8월 31일, 일본 정부는 ‘위안부’ 합의 내용에 따라 ‘화해·치유 재단’에 10억 엔(한화 110억 원)을 송금했다. 이후 화해·치유 재단은 10월 11일부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분들의 신청을 받아 피해자 중 생존자에겐 1억 원을, 사망자에겐 2000만 원을 지급하는 사업을 시행 중이다. 화해·치유 재단 홈페이지엔 사업으로 지급하는 현금에 긴 수식어가 붙어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명예와 존엄의 회복 및 마음의 상처 치유를 위한’ 현금. 화해·치유 재단 윤종휴 운영관리과장은 “10월 14일 기준으로 생존자 중 27명이 신청을 했고, 그 외 받지 않겠다는 분들에겐 설득 과정을 거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위안부’ 합의를 통해 사죄와 반성을 표명했지만 이후 일본 정부는 거듭 표리부동한 모습을 보였다. 2016년 2월 16일, 스기야마 신스케 일본 외무성 심의관은 UN 여성차별철폐위원회 회의에서 ‘위안부’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내용을 발표했다. 이 같은 내용은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에도 게시됐다. 또한 2016년 10월 3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위안부’ 피해자에게 사과 편지를 보낼 생각이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는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발언했다. 이와 같은 일본 정부의 모습에 대해 ‘일본군 위안부 연구회’ 회장인 김창록(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아베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지우기에 나섰다고 설명한다. 그는 “아베 정부는 이후로도 역사 지우기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외교에서 아베 정부는 압승했고 박근혜 정부는 참패했다”고 말했다.

‘위안부’ 합의 무엇이 문제인가
‘위안부’ 합의 이후 합의 내용에 대한 부정적인 국내 여론과 해외 기구의 비판적 의견이 형성됐다. 2016년 5월, 한국일보와 요미우리 신문이 공동으로 자국민들을 대상으로 벌인 여론 조사에서 한국인 73.4%가 ‘위안부’ 합의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일본인 49%가 긍정적, 38%가 부정적으로 평가한 것과 비교하면 양 국가에서 상반된 여론이 형성된 셈이다. 또한, UN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2016년 3월 7일 기자회견을 통해 ‘위안부’ 합의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밝혔다.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위안부’ 합의가 피해자 중심의 접근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며 유감을 표명하고, 일본 정부에 공식 사죄와 배상을 통한 피해자의 명예회복을 추진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에 앞장서고 있는 대표적 단체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위안부’ 합의 무효를 주장한다. 1992년 1월 8일부터 이어진 수요시위를 통해 정대협은 일본 정부에 다음의 7가지 사항을 요구해왔다. △‘위안부’ 범죄 인정 △진상규명 △국회결의사죄 △법적 배상 △역사교과서 기록 △위령탑과 사료관 건립 △책임자 처벌이다. 하지만 ‘위안부’ 합의엔 이 중 어느 것도 포함되지 않았다. 정대협 김동희 사무처장은 ‘위안부’ 합의에 대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의견을 묻지 않은 채 화해를 강요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라고 말했다. 한편, 일본 대사관 앞 수요시위는 ‘위안부’ 합의 이후에도 계속돼 2016년 11월 2일로 1255차를 맞았다.

‘위안부’ 문제 끝나지 않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과 활동은 ‘위안부’ 합의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3A-project 프로듀서인 심용석(인천대 중어중국학) 씨는 2015년 6월부터 80일 동안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뉴욕까지 자전거로 횡단하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세계에 알렸다. 독도경비대에서 군 생활을 하며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관심을 얻게 된 것이 계기였다. 심용석 씨는 “프로젝트의 목표는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것”이라며 “고민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실패에서 얻는 교훈 또한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본교에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두고 활동을 이어나가는 학생들이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위해 행동하는 대학생 단체 ‘평화나비네트워크’ 고려대 지부다. 고려대 평화나비는 본교 내 수요시위를 진행하고, 추모의 벽을 설치하는 등 일본군 ‘위안부’ 알리기 활동을 하고 있다. 고려대 평화나비 박예지(경영대 경영15) 회장은 “학우 분들이 많은 관심을 두고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일에 동참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011년 12월 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기 위해 제작됐던 평화의 소녀상은 이후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도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 2016년 10월 22일엔 중국에는 처음으로 한·중 평화의 소녀상이 상하이 사범대학에 세워졌다. 증조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는 정철(Zhe Cheng, 국제대학원) 씨는 “중국도 한국과 같은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며 “중국과 한국이 힘을 합쳐 일본 정부가 역사를 인정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1970년 12월 7일, 독일의 빌리 브란트 총리는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이후 그는 자서전에서 당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수백만 희생자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며 독일의 역사적 심연 끝에 서 있다. 나는 인간이 말로써 표현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을 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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