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블랙리스트가 우리말로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학살예비자명단’입니다. 박근혜가 무슨 자격으로 이 땅의 1만여 명의 예술가들을 학살예비자명단에 포함을 시킵니까. 이는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에나 있을 법한 얘기입니다.”

  지난 10월 18일 광화문 광장, 블랙리스트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에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소리 높여 외쳤다. 그동안 예술인들 사이에서 의혹으로만 제기돼 온 ‘블랙리스트’의 실체가 드러났다. 언론을 통해 공개된 블랙리스트에는 1만여 명에 달하는 문화예술인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한 언론은 조윤선 전 정무수석이 청와대 정무수석실에서 블랙리스트의 작성과 전달을 주도했다고 밝혔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예술가들은 세월호 사건의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냈거나, 특정 정치인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정부 검열의 대상이 됐다.

 

▲ 10월 18일 광화문 광장에서 블랙리스트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문화예술인 예술행동 및 기자회견이 진행됐다. 사진 | 조재석 기자 here@

1만 명이 나열된 블랙리스트
  블랙리스트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문화예술인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줬다. 예술인소셜유니온 하장호 사무처장은 민주주의라는 틀에서 정치적 성향이 다르다고 탄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그는 “지난 정권부터 의도적인 배제들이 공공연하게 이뤄져 왔지만 이번 블랙리스트 사건처럼 공식적으로 확인된 적은 없었다”며 “블랙리스트를 통해 예술계를 포함한 우리 사회의 총체적인 문제들이 드러났고, 민주성 또한 완전히 무너지게 됐다”고 말했다.

  청년예술가이자 예술계 대학생인 강수빈 작가는 앞으로의 활동 방향이 막막하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의 의도에 반하는 예술 행위를 했을 때 이처럼 노골적으로 경제적인 제재가 가해진다는 점에 놀랐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정부의 예술 검열로 인한 지원 배제가 청년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창작 활동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했다. 청년예술가들은 기성예술가에 비해 금전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작업하기에 정부에서 지원하는 창작지원금이 없으면 활동을 이어나갈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익명을 요구한 연극평론가는 “일제시대나 군사독재시절과는 달리 지금 정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교묘하게 검열을 하고 있다”며 “이러한 방식은 지원금이 절실한 청년예술가들에게 스스로 자기검열을 내면화하도록 만들 것이며, 작품에 메시지를 담고자하는 의지마저 꺾어버린다”고 말했다.  

 

▲ 출처 | 한국예술종합대 제 20대 총학생회 페이스북

청년예술가와 예술계 학생들의 참여형 행위예술
  블랙리스트의 실체가 드러나자 문화예술계에서는 정부의 시대착오적인 예술 검열을 강하게 비판했다. 블랙리스트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기성 예술가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행위 예술 퍼포먼스를 진행하며 예술계 각계각층의 목소리를 한데 모았다. 또한, 예술계 학생들과 청년예술가들도 시국선언문과 행위 예술로 예술인의 저항에 동참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총학생회는 10월 29일 시국선언문을 통해 비이성적 시국에 예술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하겠다고 밝혔다. 선언문 발표 이후 한예종 총학생회는 굿 형식의 예술공연인 ‘시굿선언’을 진행했다. 황예정 한예종 총학생회장은 “굿판은 춤과 노래가 복합적으로 결합된 종합예술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왔지만, 현재 언론에서 부정적으로 비치고 있어 안타까움을 느꼈다”며 “예술적, 공연적인 성격을 강조한 퍼포먼스를 통해 현 시국에 대한 목소리를 담아내게 됐다”고 밝혔다.

  청년예술가들도 기성 예술인의 바통을 이어받아 시국선언 행위 예술을 선보였다. 지난 5일 광화문 광장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는 청년예술가들의 퍼포먼스가 진행됐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습니다’ 세월호 일러스트를 그린 신주욱 작가는 달력을 한 장씩 뜯어 광장 바닥에 빼곡히 붙였다. 신주욱 작가는 “집에 붙어 있는 달력들의 숫자를 보니 매일매일 대통령의 하야를 기다리는 국민의 마음이 떠올랐다”며 “답답한 마음을 표현하고자 달력에 ‘하야’라는 글자를 적어 넣고 한 장씩 바닥에 뜯어 붙이고, 발로 밟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고 말했다.

  강수빈 작가는 검은색 상자를 수십 개를 준비해 광화문으로 나갔다. 그는 “하루가 다르게 문제가 쏟아져 나오는 요즘, 우울하고 삭막한 분위기를 환기시켜 보고자 선물을 드리게 됐다”며 “상자 속에는 많은 국민들이 간절히 원하는 ‘대통령 하야’를 담아봤다”고 말했다. 강 작가가 건넨 상자 속에는 ‘하야 하겠습니다 –박근혜-’라는 내용의 쪽지가 들어 있었다. 

 

▲ 연세대 원주캠퍼스 청송관에는 종이를 벗겨내며 올바른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참여형 대자보가 붙었다. 출처 | 연세대 디자인예술학부 페이스북

연대하면 더 큰 목소리 낼 수 있어
  예술계 대학생과 청년예술가의 참여를 보며 여러 문화계 인사들은 독려의 목소리를 전하고 더욱 적극적인 참여를 당부했다. 청년예술가 네트워크 송상훈 대표는 “예술의 표현 자유와 창작지원금 등의 문제는 청년예술가들에게 생존의 문제이므로 정부의 문화정책에 대해 더 관심을 갖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이전과는 달리 개개인의 예술가들이 공동체를 통해 밖으로 나오고 있다”며 “학생들은 기성 예술가 보다 더 자유롭기에 그룹별로, 학교별로 의견이 취합되면 더 큰 목소리로 과감한 주장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한편 청년예술가들의 새로운 예술 활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예술인소셜유니온 하장호 사무처장은 “예술은 창조적인 생각으로 부패한 사회에 균열을 내고 그 틈새를 벌리는 효과를 낸다”며 “앞으로 사회는 청년예술가나 시민예술가들의 예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지원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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