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김주성 기자 peter@

  100만 명의 시민이 광화문 광장에 모였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100만 명의 주권자가 밝힌 촛불은 하나의 장관을 만들어냈다.

  이전 민중총궐기와 다른 모습도 많았다. 민주노총이 신고한 ‘서울광장⟶세종로교차로→내자교차로→청운동사무소’ 구간의 행진은 이전에는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상까지만 제한적으로 허용됐다. 하지만 12일 서울행정법원의 결정으로 내자교차로(경복궁역)까지 행진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작년 민중총궐기에 비해 경찰에 연행된 사람들도 훨씬 적었다. 집회 최전선인 내자교차로 차벽 앞 역시 시민들은 “비폭력”을 연호하며 폭력시위를 경계했다.

  언론과 시민들은 자평했다. ‘비폭력 집회의 승리’이며 ‘성숙한 시민의식의 발현’이라고. 이제 우리의 시위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나. 그리고 우리의 목소리는 과연 청와대까지 들렸을까. 

‘100만 명’이 모였다
  김규항(칼럼니스트, 김) | 낭만적으로 보지만은 않는다. ‘대통령에 의한 민주주의 질서 파괴’라는 보편적 의제를 내세운 시위에서 100만 명은 너무 지당한 숫자다. 반면 대중의 삶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비정규직, 경제 문제에 대한 투쟁의 경우엔, 대중들의 참여와 연대가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런 점에서 100만 명은 정말 많은 수이지만, 이 숫자가 발전된 시민의식과 등치되긴 어렵다. 100만 명이 광장으로 나온 것이 정치적 무기력을 극복한 시민의식이 성숙한 결과인지 아니면 의제의 특수성 때문인지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이관후(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원, 이) | 박근혜 정권의 폭력성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함께 저항했다는 데에서 숫자의 의미가 있다. 1987년 민주화 운동 이래로 30년 만에 시민들이 부당한 권력을 몰아내기 위해 직접행동에 나섰고, 이는 헌법에 명시된 인민주권의 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더해, 과거와 다른 점도 눈에 띤다. 과거에는 학생과 재야지식인 위주의 거리 민주주의였다면, 21세기는 SNS를 통해 다양한 계층, 집단의 시민들이 참여하는 거리 민주주의로 재탄생했다.

100만이 유의미한 결과를 냈나
  김 | 100만이라는 숫자가 만들어낼 수 있는 효과는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이번 시위는 100만이 만들어낼 수 있었던 가장 낮은 위협을 구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질서정연하게 문화제에 참여했고 쓰레기를 모두 치운 집회에 대해, 정권은 상대적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의 관심사는 100만이 모인 시위에서 ‘과연 이들이 얼마나 위협적일까’이며, 덜 위협적일수록 그들은 더 안심할 것이다. 박근혜 정권이 버티기로 들어간 이상 퇴진 시위도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다. 강박적 비폭력 요구가 과연 내 목소리인지, 시스템에 의해 강요된 목소리인지 살펴봐야 한다.

  | 100만 명의 힘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새누리당은 왜 분열했고, 야당 대표는 왜 영수회담을 철회했으며, 박근혜 대통령은 왜 제대로 된 변호 하나 받지 못했나. 그리고 왜 기자들은 갑자기 용감해질 수 있었나.

  또한 100만이 모인 과정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가 광장에 모인 이유는 단지 대통령을 퇴진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해, 인간이 살 수 있는 대한민국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금 시민들이 광장에 함께 모여 정치를 하는 것은 대통령이 권력의 소유자가 아니라, 시민들이 주권의 최종적 담지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평화시위라고 자축하고 있다
  | 보수 언론에서 성숙한 시민의식과 평화적인 시위에 대해서 찬사를 내보내고 있다. 우리는 이런 입에 발린 칭찬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시위가 아닌 시위문화를 칭찬하는 것이다. 시위의 목적은 시위문화가 아니다. ‘우리가 얼마나 체제와 정권에 위협이 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위력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가 시위의 목적이다. 지배 체제가 칭찬하고 우리가 자부심을 느끼는 시위란 과연 무엇일까. 꽤나 모순적인 상황이다. 일각에선 이번 시위를 경찰과 조선일보가 좋아하는 시위라고까지 평가한다.

  | 시위는 분노를 표출하고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장소만은 아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시민들 간 상호 연대를 확인하고 스스로 주권자임을 축하하는 축제의 장이다.

  또한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수록 시위는 그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 폭력시위보다는 비폭력시위에 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춰보면, 비폭력과 평화를 내세운 이번 시위는 충분히 의미가 있어 보인다. 민중총궐기는 100만 명의 시민이 억눌렸던 정치적 함성을 울렸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집회가 남긴 과제는
  김 | 물론 비폭력 시위가 아이나 가족 단위 등 더 많은 사람의 참여를 만들어낼 수 있고, 장점과 미덕이 많다. 하지만 폭력이라는 단어에 강박적 태도를 갖는 건 되새겨볼 일이다. 실제로 폭력시위가 주장되거나 발생하지 않았는데도, 감시하고 내부 검열을 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나. 이는 시위의 노선이나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 길들여지고 내면화된 부분이 발현된 것이라고 본다. 이런 구조에선 오히려 비폭력을 말하는 사람들이 폭력을 행할 수 있다. 폭력에 대한 강박적인 배제가 또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박근혜 퇴진은 한 목소리지만 그 내용이나 전망은 다를 수 있다. 박근혜만 없는 상태를 바라는 사람도 있고 박근혜로 상징되는 체제의 변화를 바라는 사람도 있다. 시위의 형태나 방식은 그와도 관련이 있다. 서로의 차이에 대해 존중할 필요가 있다.

  이 | 100만 명이 모인 집회가 어떤 형태로 나타나야 하는가에 대해선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 하지만 이들의 의견이 모두 하나로 일치되어야 한다면, 혹은 그 중 몇 개만이 절대적으로 옳다면, 그것은 자유가 질식된 민주주의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마키아벨리와 카이사르의 말대로, 모든 것은 상황에 따라 항상 달라진다. 말 그대로 ‘어제는 맞고 오늘은 틀리다’ 일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합의된 시위의 형태 곧 결과가 아니라, 합의의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완전한 합의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합의를 위한 과정의 가치가 상실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100만이 모여서 박근혜의 하야를 외치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 이 나라를 이렇게 만든 장본인은 바로 유권자인 우리이고, 우리가 먼저 바뀌지 않고서는 이 사회가 절대 바뀌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반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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