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뻔한데 당당한 척한다.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심판 변론이 일곱 차례가 진행되는 동안 헌재의 증인 출석 부름에도 ‘그들은’ 뻔뻔했다. 7차례에 걸친 청문회에서 보여주듯 그들은 한결같았다. 기자들과 국민 앞에 겉으론 겸손한척하면서 불출석, 모르쇠, 무능함으로 일관했다. 물론 겸손한‘척’조차 안 한 사람도 있었지만 말이다. 이 사태의 두 주인공은 더 가관이다. 한 살씩 더 먹었는데도 더 뻔뻔해졌다. 두 주인공의 변호사들은 ‘변호’를 위해 그렇다 치자. 눈물을 머금고 떨리는 목소리로 ‘sorry’를 말하던 두 주인공은 ‘sorry?’를 외치며 눈물을 닦고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해명인 듯 해명 아닌 해명을 한다.

  헌재에서 나를 부른다. 증인 출석하란다. 청문회에서 불렀을 때도 무시했는데 언론에서 하도 떠들어서 한 번쯤 나가야겠다. 위에 시키는 대로 주변에서 하는 대로 따라했을 뿐인데 부끄럽지 않으냐고 나무란다. 전혀. 같이 증인 출석하는 동료를 보니 증거와 혐의가 하나하나 드러난 거 같은데 당당하다. 그래 당당하자. 수갑 찬 애들은 나뭇가지에 불과한 것들이야. 몰랐다고 하는 거야. 아직 난 강하니까.’

  ‘그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그들이 당당한 이유는 자신의 범죄에 대한 책임을 피하려 떳떳한 척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아닐까. 어쩌면 이번 사태의 본질은 민주주의와 헌법질서보단 인간의 탐욕과 도덕성에 관한 문제일지 모른다.

  초등학교에 막 들어갔을 때 친구 따라 오락실에 갔다가 친구의 돈을 빌린 일을 아버지한테 속인 일이 떠오른다. 평소라면 회초리를 들었을 텐데 아버지는 오히려 친구 돈을 갚으라며 내게  동전들을 건넸다. 그리고 이어진 아버지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돈으로 양심을 가리진 말아라”

  지금 그 말이 너무나도 밉다. 내 인생 전부가 양심적이라 말할 순 없지만 ‘그들’에 비하면 초라하다. 새로이 다짐해본다. “나도 ‘그들’처럼 뻔뻔하게 아니 당당하게 살겠다!” 하지만 이 다짐을 곱씹으면서 씁쓸한 뒷맛과 함께 나온 한숨은 어쩔 수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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