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거짓말은 9할의 사실에 1할의 가짜를 배합한 것이라는 격언처럼, 어떤 서사물에서 풀어내는 상상력의 기본은 그럴듯함이다(‘핍진성’이라는 험난한 학술용어는 피하고 싶다). 그런데 생동감 넘치는 그럴듯함의 비결 가운데 하나는, 환상적인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이라 할지라도 우리들도 쉽게 경험하곤 하는 현실적 제약을 짊어진 채로 활동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그런 제약 가운데 가장 확실할까. 인간적 마음 뭐 그런 대단한 것을 꼽을 수도 있다. 하지만 훨씬 절절한 것이 있으니, 바로 밥을 먹어야 한다는 점이다. 밥을 해먹는 것이 주는 현실적 생활감이야 말로 그 위에 온갖 호쾌한 상상력을 발휘하기 좋은 최고의 토대다.

  <던전밥>(쿠이 료코 / 소미미디어)은 용사의 팀이 용을 사냥하는 중세풍 판타지 이야기를 펼치는 작품인데, 밥을 해먹어야 활동할 수 있다는 단단한 생활감을 품고 있다. 용에게 잡아먹힌 동료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그 용을 찾아 죽여야 하는데, 그러려면 긴 시간의 탐험을 하며 적잖은 마물들과의 싸움을 거칠 수 밖에 없다. 그럴 수 있는 힘은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밥을 먹어야 한다. 문제는 많은 양의 밥을 사기 위해서는 돈이 들고, 운반하기도 무겁다는 점이다. 이것을 해결할 묘수가 있으니, 바로 싸워 이겨낸 마물을 먹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온갖 기묘한 모습과 성질의 마물들을 어떻게 감히 먹어버릴 수 있을까.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 재료의 성질을 잘 파악하여, 맛있게 요리하는 것이다.

  밥을 해먹는 생활감이 탄탄한 중심이 된 상태에서, 충실하게 끌어오는 중세풍 판타지의 오래된 설정들은 완전히 새로운 각도의 상상력이 된다. 무정형 생물인 슬라임은 판타지 장르에서 흔하게 익숙한 마물이다. 하지만 과연 슬라임을 먹어보면 어떤 맛이 나는가. 슬라임이 현실의 생물이라면 무엇과 비슷하며, 그런 형질을 볼 때 어떤 요리법이 가장 영양과 맛을 잘 끌어낼 것인가. 밥 해먹는 생활감이 마물 생태계에 대해 새로 촘촘하게 채워 넣어야 할 상상력을 이끌어낸 셈이다. 캐릭터들의 관계조차 일반적인 탐험 팀 구도에 더하여, 마물 요리에 혼을 건 드워프 센시와 기이한 식자재에 질색하는 엘프 마법사 마르실 같은 음식 중심의 구도가 생겨나며 한층 풍부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밥을 먹어야 산다는 미시적 현실을 단단하게 붙잡으니, 장르적 세계가 관행의 반복이 아니라 입체적이고 구체적인 세계로 바뀐다. 이렇듯 <던전밥>은 호쾌한 상상과 가장 거리가 먼 평범한 현실감을 냉정하게 되짚어볼 때, 오히려 더욱 정교하고 거대하며 무엇보다 재미있는 상상이 될 수 있다는 좋은 사례다. 비단 중세풍 판타지물 뿐만 아니라, 어쩌면 현실 사회의 진보 방향에 대한 상상에도 대입할 수 있는 교훈일지도 모르겠다.

 

글 | 김낙호 만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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