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세월호에는 9명의 사람이! 생명이 있습니다!” 7일 오후, ‘다윤이 아빠’ 허흥환(남·53) 씨가 광화문 집회 현장에서 세월호 인양을 촉구하며 울분을 토해냈다.
그 날로부터 1000일이 흘렀다. 팽목항에 머무르는 미수습자 가족의 바람은 두 가지다. 미수습자 가족이 아닌 유가족이 되는 것. 그리고 2014년 4월 16일에서 벗어나는 것. “1000일 째 우리는 2014년 4월 16일에 살고 있어요. 이제는 4월 17일을, 18일을 살아가고 싶어요.”

▲ 빨간 등대로 향하는 난간엔 '온전한 세월호 인양'을 염원하는 리본이 묶여있다. 사진 | 이민준 기자 lionking@

“4월 17일을 살도록 해 주세요”
 
‘1000일이 눈앞인데 차가운 바다 속에 아직도 사람이 있습니다.’ 팽목항을 찾은 사람들은 플래카드 앞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축구를 좋아했다는 박영인(남·18) 군의 사진 앞에는 세월호 참사 전 사주지 못했던 축구화가 두 켤레 놓여있다. ‘사랑하는 내 아들, 너를 기다리는 모든 이의 따뜻한 품에 어서 돌아오렴. 사랑한다.’

  미수습자 가족들은 팽목항 내 공터에 설치된 컨테이너와 조립식 가옥에서 생활하고 있다. 컨테이너 박스 안은 보일러만으로 냉기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바닷물만큼 찬 공기가 이내 가득 찼다. ‘은화 아빠’ 조남성(남·54) 씨는 담배 연기만 연거푸 내뱉었다. “컨테이너에서 생활하는 게 쉽지는 않지. 그래도 아이를 생각하면 이 정도 불편은 아무 것도 아니여. 몸 상하지 말라고 잊지 않고 우리를 챙겨주는 국민들에게 감사할 뿐이지.”

  식당으로 쓰이는 컨테이너 안에는 미수습자를 상징하는 인형이 9개 걸려있다. 미수습자들의 사진 옆에 가지런히 걸려 있는 9개의 인형. 털모자와 목도리가 꽁꽁 둘러져 있다. 미수습자들이 가족의 품에 다시 안길 때까지 9개의 인형은 가족의 곁을 지킨다. ‘은화 엄마’ 이금희(여·48) 씨는 작년 12월 3일 광화문에서 인형들을 받았다. “팽목에 돌아와서 받은 인형을 냉장고 옆에 놨더니 4개가 사라져버렸지 뭐야. 안타까운 마음에 5개만이라도 벽에 걸어놨지요. 그러다 인형을 주신 분과 연락이 닿아 4개를 다시 받게 됐어요. 새로 보내주실 때 은화와 다윤이 인형에는 털모자를 이쁘게 씌워 보내주셨네요.”

  3년 동안 미수습자 가족들은 소외돼 왔다. 유가족들과 같은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미수습자 가족들은 아직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래서 인양을 1순위로 바란다는 점에서 그 처지는 다르다. 미수습자 가족은 세월호 인양에 대한 국가의 책무가 특별법에 명시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윤이 엄마’ 박은미(여·47) 씨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만약 내 아이가 유괴됐다고 생각해봐요. 아이를 찾는 게 먼저일까요, 유괴범에게 ‘왜 그랬냐’고 묻는 것이 먼저일까요? 당연히 아이를 찾는 게 먼저 아녜요? 그런데 세월호 참사에선 유괴범에게 왜 그랬느냐고만 묻고 있어요. 진상을 규명하지 말자는 것이 아녜요. 다만 미수습자 가족들의 목소리도 들어야 한다는 거죠.” 하지만 2014년 ‘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 일명 세월호 특별법 제정 과정에서 미수습자 가족의 요구는 반영되지 않았다. 현재 국회에서 계류 중인 10개의 법안 중 세월호 인양을 국가의 책무로 명시한 법안은 1개 뿐이다.

  이금희 씨는 가슴 속 응어리를 토해냈다. “나는 우리 딸만 찾으면 돼. ‘우리 딸을 어떻게 찾을까, 어떻게 찾을까’라는 생각만으로도 벅차요. 그래도 엄마니까 알고 싶지 않겠어요? 왜 내 딸이 1000일 동안이나 바다 속에 있는지? 빨간 등대 앞에 앉아 있으면, 바다 속에서 은화가 말을 건네는 것만 같아. 괜찮다고, 아프지 말라고 해.”

  1000일의 기다림 속에서 미수습자 가족들은 건강을 잃었다. 이금희 씨의 혈당은 정상 수치 2배를 훌쩍 넘긴 지 오래다. 박은미 씨는 세월호 참사 이후 신경섬유종 발병으로 오른쪽 청력을 잃었다. 그럼에도 박 씨는 이곳을 지켜야만 한다. “내가 힘들고 아픈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아이를 찾는 것, 세월호를 인양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죠. 집회에 참석하고 간담회를 찾는 것이 힘들지라도,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빨리 돌아올 수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할 거예요.”

  차갑게 얼어붙은 날씨에도 팽목항을 찾는 발자국은 1000일의 시간만큼 쌓이고 있다. 홀로 팽목항을 찾은 사람부터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까지. 방문객들은 분향소를 찾아 절을 올렸다. 빨개진 눈을 애써 훔치며 외벽에 걸린 타임라인을 천천히 읽어나간다. 타임라인을 빼곡히 채운 정부의 미숙한 구조 활동 앞에서 사람들은 짧은 탄식을 뱉어냈다.

  김일수(남·53) 씨는 오늘도, 아내와 함께 팽목항을 찾았다. 2015년부터 스무 번을 찾아오면서 미수습자 가족의 힘겨운 시간을 함께했다. “어떤 사람들은 말로만 ‘함께 하겠다’고 해요. 함께 하겠다는 사람이 가족들을 만나보지도 않는 것이 말이 됩니까? 소외되고 있는 미수습자 가족들의 목소리를 들어야죠.” 부천에서 팽목항 컨테이너를 찾은 이승훈(남·32) 씨는 이번 겨울에 팽목항을 처음 방문했다고 말했다.

  “2015년 가을 간담회에서 다윤이 어머니를 처음 뵀어요. 그때 팽목항을 꼭 오겠다고 다짐했는데, 이제야 찾게 됐네요.” 이 씨는 깊은 밤 가족들의 손을 굳게 잡았다. “세월호를 온전히 인양하고, 미수습자들을 수습할 때까지 가족들과 함께할 겁니다.”
 

▲ 사진 | 이민준 기자 lionking@

“서울에서도 함께 합니다”
  ‘조은화’ ‘허다윤’ ‘남현철’ ‘박영인’ ‘고창석’ ‘양승진’ ‘권재근’ ‘권혁규’ ‘이영숙’
밤새 내린 눈으로 얼어붙은 청운동사무소 앞. 13일 아침 서울의 온도계는 영하 7도를 가리켰다. 낮에도 풀릴 줄 모르는 추위 속, 이우준(남·39) 씨는 오늘도 피켓을 펼쳐들었다. 이 씨는 작년 2월 세월호에 관한 연극을 준비하며 피케팅을 시작했다. 세월호 참사를 되새기고, 미수습자 가족에게 힘이 되고자 시작했던 피케팅이 1년간 이어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처음엔 2달간 진행될 연극 작업을 하는 동안이라도 옆에서 힘이 되고자 했어요. 그런데 인양이 계속 지연되면서 미수습자 가족들이 겪는 고통을 조금이나마 체감하게 됐죠. 피케팅을 그만둘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매주 나오다 보니 어느새 1년이 다 돼가네요.”

  미수습자 가족을 위한 피켓은 서울 곳곳, 특히 홍대입구역 앞에서 꾸준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1번 출구와 횡단보도 앞에선 김권환(남·43) 씨와 고규인(여·51) 씨가 피켓을 들고 서 있다. 행인들에게 리본을 나눠주는 김 씨의 손끝은 빨갛게 부르텄다. 2년 동안 피케팅을 계속하며 그의 마음 속은 상처로 가득해졌다. ‘아직도 세월호냐?’, ‘나라가 뭘 잘못했느냐?’ 등의 힐난부터 ‘자식 가지고 장사하냐’ 등의 험담까지 수많은 모욕을 들었다. 밑도 끝도 없는, 원색적인 비난이 마음을 후벼팠지만, 그럼에도 김 씨의 피케팅을 멈추진 못했다. “세월호 참사는 상식이 무너졌기 때문에 벌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사소한 것들부터 지켜나가며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가족이 사고를 당했을 때도 마냥 무관심하게 지켜만 볼 수 있을까요?”

  최근에는 봉사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부드러워졌다. 이전과 달리 피켓 속 미수습자의 얼굴을 유심히 지켜보는 사람이 늘어났다. 얼마 전에는 밝게 웃는 권혁규(남·6) 군의 사진을 보며 ‘미수습자 중 아이도 있냐’는 질문을 던지는 행인도 나타났다. 고규인 씨는 옷깃을 여미며 빙긋 웃었다. “우리를 향한 비난이 완전히 사그라든 것은 아녜요. 하지만 따뜻한 한마디를 건네는 시민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관심을 두는 분들도 많아졌죠.”

  오늘도 세월호 침몰 수역에선 인양 작업이 진행된다. 잠수부들은 바다가 잠잠해질 때마다 산소통을 들쳐메고 작업에 들어간다. 2015년 8월 19일 참사 490일 만에 처음 시작된 인양 작업, 정부가 약속한 기한은 작년 7월이었다. 하지만 세월호가 뭍으로 올라올 날은 아득하기만 하다. 바다의 흐름, ‘물 때’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미수습자 가족들은 오늘도 기도한다. ‘바다야... 제발 잠잠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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