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는 두 진영에 속한 이들의 운명적 사랑, 그 사이에서 탄생한 금단의 아이, 보금자리를 찾아나서는 그들의 갈등과 화해로 이뤄진 지극히 통속적인 가족 멜로드라마가 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쾌감이 부족했는지, 그들을 쫒는 여러 추격자들의 액션 스릴러가 더해지고, 이국적 풍경과 다양한 종족의 탐구 같은 고전 모험물 요소와 심지어 성적 코드도 마구 집어넣는다. 그 모든 요소를 끝까지 증폭시켜서 아예 대형 스페이스오페라로 만들어버린다. 지리멸렬함과 과도한 욕심이 겹치며 망하기 딱 좋은 재료 투성이지만 신기하게도 명작이 되어버린 흥미로운 작품, 바로 <사가>(브라이언 본 글 / 피오나 스테이플스 그림 / 시공사)다.

  <사가>의 세상은 과학을 발달시켰고 날개가 달린 주민들이 사는 행성 랜드폴, 그리고 뿔 달린 주민들이 마법을 발달시킨 위성 리스 사이에서 전쟁이 진행 중인 곳이다. 왜 싸움을 시작했는지조차 잊어버린 오랜 전쟁의 와중에 다양한 여타 종족들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진영에 합류했고, 전선의 바깥에서는 공인해결사들이 지저분한 뒤처리를 한다. 그런 장대하고 험악한 배경이지만, 정작 이야기는 아기가 탄생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적당히 거룩하고 예쁜 분위기가 아니라 산모가 산통으로 온갖 욕설을 다 해대는 난데없이 사실주의적인 상황과, 외계 문명다운 환상적 공간이 있다(본이 펼치는 뛰어난 이야기와 대사는, 각종 공간과 종족들을 매력적으로 구현해내는 스테이플스의 환상적인 필력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이렇듯 이 작품의 최대 묘미는, 거대한 상상력과 통속적 현실성이 마구 뒤섞이며 사람 사는 이야기를 시작하는 지점에 있다. 

  따지고 보면 라스의 병사였던 남자 마르코, 랜드폴의 병사였던 여자 알라나가 전선에서 눈이 맞아서 두 우주적 세력의 추격을 따돌리며 사랑의 도피를 하는 장쾌한 이야기다. 하지만 애가 태어나자 현실적인 육아 문제가 눈앞에 놓이며, 보모가 필요하다. 둘의 사랑만 있으면 될 것 같지만, 그것은 갈등하고 싸우면서도 서로를 진지하게 존중해주는 만큼씩만 유지되는 현실적 사랑이다. 그렇게 겨우 조율하기 바쁜데, 시부모님까지 쳐들어온다. 한편 피도 눈물도 없는 추격자들이 따라붙는데, 그들조차 각자의 가족 관계와 권태와 기타 문제로 시달리는 생활인들이다. 그 누구에게도 우주는 원하는 대로 혹은 최소한 장르적 규칙에 따르는 적당히 수월한 결과로 풀려주지 않는다. 

  넓고 낯선 세계의 경이, 살아가는 방식으로서의 자질구레한 현실감, 최선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우연과 혼돈의 세상사, 이런 것들은 그야말로 우리가 사는 세계이기도 하다. <사가>의 우주에서도 우리의 현실에서도, 삶은 환상적이고 통속적이고 어지럽다. 그렇기에 우리는 반목과 갈등을 하면서도, 서로를 대등하게 존중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랑도 할 필요가 있다. 그런 뻔하고 통속적인 교훈이 사실은 얼마나 매력적인지, <사가>를 읽고 확인해보기를 권한다.

글 | 김낙호 (만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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