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 | 주재민 전문기자

  “누나. 나는 핵 쏜 적 없는데 핵 맞았다며? 뭐 탄핵?” 글 아래엔 유선전화를 손에 든 북한의 김정은 사진이 담겨있다. 10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 인용된 정치적 배경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게시물이다. 게시물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온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인해 정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 ‘썰전’, ‘강적들’과 같은 정치예능 방송이 큰 인기를 얻고,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정치 풍자 이미지 ‘정치짤방’은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어렵고 진지했던 정치가 가볍고 재밌는 정치로 사람들에게 다가왔다. 전문가들은 이와 같은 변화가 재미를 추구하는 이 시대의 소비문화에서 비롯됐다고 진단한다. 전문가들은 가벼워진 정치가 정치의 일상화를 만들었지만, 정치를 ‘너무 가볍게’ 만들었다며 우려의 의견을 비치기도 한다.

  예능의 소재가 된 정치의 인기몰이
  바야흐로 정치예능 방송 전성시대다. 대표적인 정치예능 방송으로 평가받는 JTBC의 정치예능 토크쇼 ‘썰전’은 지난 2월 한국갤럽의 ‘한국인이 좋아하는 TV 프로그램’ 설문조사에서 11.2%의 선호도로 1위를 차지했다. 2위 MBC의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을 2.5%포인트나 앞선 수치다. 지난 2월 SBS에선 ‘대선주자 국민면접’이라는 대선주자들이 정치 전문가에게 면접을 받는 기획의 방송이 방영되기도 했다. 대중 친화적인 정치 전문가들이 진입장벽이 높았던 정치를 알기 쉽게 제공하면서 대중들의 정치 관심도도 높아졌다. 정명호(사범대 국교14) 씨는 “일방적으로 소식만 전달하는 뉴스와 달리 정치 전문가들이 의견을 교환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이해가 쉽고 재밌다”며 “방송을 본 후 뉴스를 다시 보며 기존의 생각과 다른 새로운 합의점을 도출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기존 인터넷의 짤방 문화는 정치와 결합해 ‘정치짤방’으로 활발히 생산·소비되고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에서 처음 만들어진 ‘짤방(짤림 방지 이미지)’은 이용자들이 게시글의 삭제를 막기 위해 글에 아무 이미지나 첨부하던 것에서 비롯됐다. 짤방은 이제 정치풍자 이미지로 더 활용된다. 2013년 말에 만들어진 ‘정치짤방’ 트위터의 팔로워 수는 현재 5만 명에 달할 정도다. ‘이재용 구속은 언제쯤 되나요? 이제용’이란 제목의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짤방은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정치짤방 운영자 김 모씨는 “정치짤방은 정치를 모르는 사람도 공감하고 웃을 수 있다”며 “처음엔 단순한 재미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하나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네티즌들의 이러한 짤방 문화는 정치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정치인들이 스스로 패러디나 짤방을 만들어 SNS에 올리기도 한다. 온라인상에서 형성되는 사람들의 관심이 그 자체로 정치적 힘을 의미해서다. 대표적으로 ‘잘생긴 안희정’, ‘균블리’, ‘느와르메이커 추미애’, ‘명왕 문재인’ 등이 있다.

  시대적 흐름에서 등장한 정치의 가벼움
  이처럼 무겁고 진중하게 다뤄졌던 과거의 정치와 달리, 정치가 우리들의 일상에서 점점 가볍게 소비되고 있다. 김윤철(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지금 한국 사회의 정치소비는 시대적인 문화 현상이 반영된 결과라고 분석했다. 그는 “산업화와 민주화가 끝난 후 정치가 콘텐츠로서 문화 자본과 시장질서에 포섭된 것”이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과 불신이 정치를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다”고 말했다.

  더불어 정치의 예능화 배경에 SNS 매체의 특성이 반영됐다는 의견도 있다.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안도경 소장은 비정치적인 분야를 비롯한 미디어 자체의 소비행태가 일방향이었던 과거와 달라졌음에 주목했다. 그는 “정보가 대중들에게 일방적으로 전달됐던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는 SNS를 통해 상호작용하는, 탈권위적인 방향으로 이뤄지고 있다”며 “권위주의적인 기존 미디어와의 차별화를 시도한 결과, 지금의 정치예능 방송은 출연진들이 다양한 입장을 이해하기 쉽게 개진하고, 때로는 상호합의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정치에 예능적 요소를 가미하는 소비문화가 계속될지는 확언하기 어렵다. 정치가 안정되면 오히려 정치 관련 매체의 인기가 사그라지는 경향이 있어서다. 하지만 박지종 대중문화평론가는 지금 대중들의 정치 인식을 살펴보면 꼭 그 인기가 줄어들 것이라 단정 짓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는 “국민이 일종의 정치적 각성을 이뤘다”며 “과거와 달리 정치가 안정되더라도 많은 국민이 정치에 관심을 보이며 한동안 정치예능 매체의 인기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소비에 그친 정치, 비판적 태도 가져야 
  일부 전문가들은 정치의 예능화가 대중들의 비판 의식을 약화한다는 점에서 우려를 표했다. 김윤철 교수는 정치의 예능화가 사람들을 주권자가 아니라 소비자에 머물게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치가 예능화되면 정치가 사람들의 생살여탈(生殺與奪)을 결정한다는 측면을 단지 웃고 즐기는 것으로 은폐할 수 있다”며 “사람들이 정치의 본질을 소비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지’만을 소비하는 것인지 인지할 수 있는 ‘깨어있는 소비자’가 돼야 한다”고 당부했다.

  정치가 가벼워지면서 많은 사람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오히려 안 좋은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현재의 정치는 SNS와 스마트 기기의 대중화로 만들어진 ‘소셜정치’의 양상을 띠고 있다. 박지종 평론가는 소셜정치의 시대에 등장하기 쉬운 포풀리즘을 경계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는 “대중이 항상 올바른 선택을 하지는 않는다”며 “지지하는 정치인이나 정당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은 없는지 감시하고 지속적인 피드백을 하는 것이 유권자의 의무”라고 말했다.
청년들이 정치소비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정치참여로 나아간 사례도 있다. ‘청년정치크루’ 이동수 대표는 2014년 ‘위메프 사태’(면접 실기평가로 2주간 영업을 시키고 한 명도 채용하지 않은 사건)를 보고 청년정책을 직접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동수 대표는 2015년 청년정치크루를 결성해 지지정당에 상관없이 그저 ‘청년’이라는 이름 아래 20, 30대를 모았다. 현재 15명의 청년이 모여 정책토론, 정책제안 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은 실제로 정의당 정책공모전에 ‘취업준비생 보호법’을 출품해 우수상을 타기도 했다. 이동수 대표는 “정치계에 청년을 대변할 수 있는 정치인이 필요하다”며 “청년들이 단지 소비와 투표에 그칠 것이 아니라 직업으로서의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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