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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대를 바라보는 농사꾼인 할아버지는 내게 본인이 젊었을 때 경험한 일들을 자주 말했다. 한국전쟁으로 피난길에 오른 일, 집안이 너무 어려워 초등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일, 처음으로 본인 명의 밭에서 농작물을 수확한 일 등의 이야기는 항상 국가안보와 북한문제로 이어졌다. 어느 순간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한 귀로 들어와 반대편 귀로 흘러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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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6월,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가 이한열 열사 동판 제막식을 찾았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에서 학생시위를 진두지휘한 그는 최루탄을 피해 이한열 열사를 두고 도망친 자신을 한탄했다. 이어 “젊은이들의 희생 속에서 우린 목숨 걸고 싸웠습니다. 이젠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는 권력자들과 싸우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이한열 열사와 추억은 안타까웠지만 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단 눈물 어린 다짐은 내 마음을 울리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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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봄은 시민의 승리였다. 작년 말부터 매주 주말 추위를 뚫고 광화문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다. 더는 ‘헬조선’에서 ‘N포세대’로 살고 싶지 않아서다. 그리고 10일 헌법재판소장의 그 한마디에 우리는 환호했고 나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졌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조기 대선을 앞두고 대선주자들이 ‘국민통합’을 강조하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인용에도 촛불집회와 탄핵반대집회는 계속 이어지고 있어서다. 특히 탄핵반대집회에 지지자는 그들만의 확고한 신념 아래, 자신과 반대되는 입장에 과격반응을 보였다. 해당 집회 참석자 대부분은 70~80대 노인이었고, SNS에서 그들은 ‘꼰대’를 넘어서 ‘틀X’이란 표현으로 혐오의 대상이 됐다.

  민주화 운동 역사의 한 획을 그은 87년 체제가 올해로 30주년을 맞는다. 2017년은 평화적인 시민운동으로 헌법에 따라 국가 최고권력을 끌어내린 해여서 더 의미가 있다. 하지만 현재 헌법에 대해 개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87년 세대는 지난 보수정권 창출로 대중의 심판을 받았다. 진보정권의 10년과 정계에 진출한 민주화 운동권 출신들은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다면서 양극화와 민생문제를 악화시켰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세대가 아닌 체제 간의 갈등일지 모른다. 소위 박정희 체제와 87년 체제의 불완전한 민주주의는 1997년 IMF를 계기로 심화했다. 결국 2017년 촛불‘시위’는 촛불‘혁명’이 됐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린 각 체제의 개인사엔 소홀했다. 산업화시대의 역군들은 현대사회 속도에 낙오됐고, 87년 세대의 민주투사들은 불황의 늪에 빠져 가치전도 현상에 맞닥뜨렸다. 새로운 ‘2017년 체제’를 논하자는 주장이 나오는 가운데, 각 체제에서 개개인의 아픔과 인생사를 공감하고 위로하는 일이 우선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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