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성훈 교수

  글로벌금융위기 이후 나타나기 시작한 보호무역주의의 강화 및 연이어 확실시된 도하개발어젠다(DDA)의 실패, 영국의 EU로부터의 탈퇴를 의미하는 브렉시트(Brexit)로 대표되는 고립주의의 발흥, 미국 트럼프대통령이 추구하는 미국우선주의(American First)의 현실화 등 최근 수년간 관찰되고 있는 다양한 움직임에 따라 다자통상체제가 위기에 처하기 시작했다는 지적이 늘어나고 있다. 본 글에서는 다자통상체제의 시대적 변화 및 지역주의(regionalism) 현상의 강화 현상에 관한 조망을 통해 다자통상체제가 당면하고 있는 이러한 도전들을 보다 심층적으로 살펴보고, 다자통상체제의 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필요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 1957년 3월 25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6개국 간 유럽연합(EU)의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EEC)를 창설하는 내용이 담긴 ‘로마조약’이 이뤄졌다.

  세계 제2차대전 이후의 세계무역체제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해 본다면 관세및무역에관한일반협정(GATT)이 발효한 1948년부터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한 1995년까지의 기간은 소위 ‘라운드’라고 부르는 다자간무역자유화협상에 기초하여 세계무역이 지속적으로 자유화되었던 시기였다. 그런데, 다자통상체제의 승리를 상징하는 WTO의 출범은 역설적이게도 다자통상체제의 약화를 불러오게 되었다. 즉, 지속적인 무역자유화의 중요한 기제로 작용하였던 선진국 중심의 무역자유화 협상은 100개 이상의 국가가 참여하는 WTO 체제 내에서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30개국 정도에 불과한 선진국들은 2016년말 현재 164개로 확대된 회원국의 다수를 차지하는 개발도상국과 신흥경제국들의 이해관계를 대리하는 중국,  러시아, 브라질 등의 눈치를 보면서 힘겨운 협상을 진행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개도국들의 관심사를 반영하기 위해 도하개발어젠다(DDA)로 명명한 WTO 체제 하에서의 첫 번째 무역자유화협상은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의 첨예한 의견대립에 의해 결국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하겠다.

  한편 지역주의 현상은 1990년대 초반 이후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WTO의 집계에 의하면 1948년 GATT 체제의 출범 이후 지금까지 600여개에 달하는 지역무역협정(RTA)이 GATT/WTO에 통보되었으며, 현재 약 270개 정도의 RTA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세계무역의 50% 이상이 이러한 지역무역협정 내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지역주의 현상이 다자무역체제를 위협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위력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평가를 가능하게 한다. 지난 10년 정도의 기간에는 지역주의 현상이 강화되면서 초대형 자유무역협정의 체결도 크게 확대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데, 이러한 새로운 추세는 다자통상체제의 약화를 더욱 부채질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트럼프 대통령의 제동으로 현저하게 약화되기는 하였으나, 아태지역의 12개국을 대상으로 미국이 주도해 온 범태평양자유무역지대(TPP) 협상, 중국의 주도 하에 펼쳐지고 있는 포괄적지역무역협정 (RCEP) 협상 및 미국과 EU 사이의 FTA를 의미하는 범대서양무역투자동반자협정(TTIP) 협상 등 초대형(Mega) FTA를 도입하기 위한 국가 간 협상도 이러한 거대한 지역주의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영국의 탈퇴 결정에 따라 3월말 공식적으로 관련 협상을 개시할 유럽연합(EU)의 운명과 향배는 이러한 지역주의 움직임과 동시에 고립주의의 맹아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어 우리에게 매우 독특한 사례를 제공하고 있다.

▲ 2017년 3월 25일 로마조약 60주년을 맞이해 유럽연합 27개국이 다시 로마에 모였지만 영국은 없고 회원국 내 ‘탈EU’ 목소리는 커지고 있다. 이날 유럽연합은 ‘로마선언’을 채택하며 “유럽은 공통의 미래”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배경 하에 최근 진행되고 있는 ‘다자통상체제의 위기’ 관련 논의는 여러 가지의 의문점에 대한 해답을 요구하고 있다. 출범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는 지속적으로 그 영역과 영향력을 확대해 왔던 다자통상체제가 과연 어떠한 이유로 위기에 빠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가? 1990년대 초반 이후 확대일로에 있는 지역주의 추세는 단지 다자체제 약화 현상의 반작용으로 봐야 하는가? 아니면 지역주의의 확대가 다자통상체제를 약화시키는 주범으로 작용하였는가? 그렇다면 지역주의는 과연 어디에서 연원하는가? 브렉시트는 EU라는 지역주의체제의 와해를 의미하는가? 트럼프정부가 추구하는 미국우선주의와 양자주의는 다자통상체제에 어떠한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인가? 등 실로 다양한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제기되고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다양한 의문들에 대해 만병통치적인 해답을 주기는 매우 어렵다. 많은 문제들이 서로 얽혀 있음과 동시에 주요 통상국들의 입장도 각양각색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아래에서는 다자통상체제의 위기 현상을 반전시키기 위해 국제통상체제가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가를 논의해 보기로 한다.

  우선, 전후 70년에 걸친 기간(1948 ~ 2017년) 동안 다자통상체제가 정상궤도에 오르고 지속적으로 강화된 모습을 보였던 시기(1948 ~ 1990년대 초반)에 미국이 보여 주었던 강력한 무역자유화 의지와 리더십을 고려하면, 트럼프 정부의 최근 정책방향이 장기적으로 유지될 경우 다자통상체제가 그 나아갈 방향을 모르는 채 표류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커진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지난 10년간 빠른 속도로 수출대국으로 성장한 중국도 미국의 역할을 대신하기에는 아직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상당기간 동안 역부족인 것으로 평가된다. 미국처럼 책임 있는 통상정책을 전개한 경험이 거의 전무하기 때문이다. 트럼프 정부가 출범한 첫날 TPP 협정을 무효화하는 한편, NAFTA와 한미FTA 등 중요한 자유무역협정들을 폐기 또는 재협상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점도 매우 우려스럽다고 하겠다. 이처럼 미국이 다자통상체제를 회피하면서 양자주의를 고집할 경우 국제통상체제는 수많은 통상분쟁에 휩싸이게 될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중국, 독일, 일본 등 다자통상체제에 참여하는 주요 통상국들이 미국을 설득하여 다자체제로 회귀시킬 필요성이 크게 대두되는 대목이다.

  둘째, DDA 협상이 실패하게 된 주요 원인 중의 하나로 164개로 확대된 회원국들이 합의할 수 있는 협상안을 만들어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즉, 지금까지 전원합의(consensus)에 의한 일괄타결(single undertaking) 방식에 기초하여 운영되어 온 다자통상체제의 의사결정방식을 과감하게 수정하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DDA 협상과정에서도 이미 거의 합의가 이루어진 협상분야가 다른 분야에서의 합의실패에 따라 채택되지 못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EU가 오랫동안 활용하고 있는 가중다수결 방식을 채택하거나, 정보통신협정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회원국이 참여하지 않더라도 자유화 의지가 있는 국가들끼리 특정 분야에 대한 협상을 진행할 수 있도록 배려함으로써 다자통상체제 내에서 무역자유화의 지평이 효과적으로 확대되는 가능성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러한 정책방향을 취하더라도 한동안 고립주의와 양자주의가 강화되는 현상을 지켜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자국이기주의적인 정책들은 일정 기간이 지난 후 부메랑이 되어 자신의 국익을 해칠 가능성이 있음을 주지시켜야 한다. 세계경제가 지난 70년간 다자통상체제의 가치를 인정하고 강화하기 위해 노력해온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필자는 다자통상체제가 와해되거나 미국이 완전한 양자주의를 채택하여 상대방을 압박하여 자국의 이익만을 취하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한다. 다소 시일이 걸릴 수는 있으나, 앞에서 언급한 노력들을 통해 다자통상체제는 그 특유의 복원력을 발휘하여 조만간 또다시 국제통상의 중심적 운영체제의 역할과 지위를 되찾을 것으로 전망한다.

 

글 | 박성훈(본교 교수 국제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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