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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대신문
  • 승인 2017.04.10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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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번 대선이 불평등을 둘러싼 경쟁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한국의 선거가 연예인 인기투표와 다를 바 없다지만, 시대정신을 통째로 무시할 수는 없지 않은가. 여론도 그랬다. 2016년 10월 <우리리서치>가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문제가 무엇인가’고 물었더니, 불평등이라고 답한 사람이 47.3%였다. 북한의 도발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겨우(!) 18%에 지나지 않았다. 다음 정부와 국가, 미래 사회와 시대를 두고 경쟁해야 하는 사람들이 불평등을 말할 것이라 예상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유감스럽지만 내 예상은 틀렸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불평등은 고사하고 비슷한 말도 나오지 않는다. 5월 9일까지, 앞으로 남은 기간도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제법 오랜 기간 불평등의 정치와 정책을 고민하고 공부한다고 했지만, 내가 한 예상은 사실은 희망이었음을 반성한다.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왜 불평등은 ‘의제’가 되지 못할까? 

  의제와 관심으로 치면 ‘건강 불평등’의 상황이 더 나쁘다. 대선 의제가 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건강 불평등이 사회적 발언을 시작한 것은 최대한 늦추어 잡아도 2006년이다. 그해 주요 언론으로는 처음으로 <한겨레신문>이 기획 보도를 했고, 한국건강형평성학회라는 학술 조직이 출범했다. 기대가 아주 크지는 않았지만, 비관한 것도 아니었다. 언론사가 붙었고 그럴듯한 학회도 만들어졌다. 몇몇 공무원과 정치인도 관심을 보였으니. 이제 정부가 조금이라도 무슨 정책을 내놓겠거니, 시민단체나 의료인들도 무슨 아이디어를 내겠거니, 기대했다. 혹시 흔하디 흔한 무슨 ‘로드맵’이라도?

  10년이 더 지난 지금 상태는 모두가 알고 느끼는 그대로다. 건강 불평등은 정치와 정책, 사회적 실천의 아젠다가 되기는커녕 ‘시민권’도 분명치 않다. 말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태반이고, 말을 알아도 오해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사회 문제라는 데에 동의하는 사람, 바꾸기 위해 ‘개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 적다. 한 마디로 존재감이 없는 상태, 건강 불평등은 그런 상태다. 왜 건강 불평등은 ‘의제’가 되지 못할까?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건강 불평등과 의료 불평등은 다르다는 것을 먼저 말해야 하겠다. 익숙한 경제용어를 빌려 쓰면, 의료는 ‘투입’이고 건강과 병은 ‘산출’이다. 의료는 건강이라는 결과물을 산출하는 데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요소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불평등의 의미도 이유도 다르다. 의료 불평등은 쉽게 생각할 수 있으니, 상식적이다. 여기서는 주로 건강 불평등을 논의하려 한다.    

  중요하지 않아서, 심각하지 않아서, 건강 불평등 논의가 없는가? 어떤 기준으로 봐도 그렇지 않다. 얼른 눈에 보이는 통계 하나를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2016년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연구팀이 직업별 사망률 자료를 분석한 결과, 남성 단순 노무직 노동자의 사망률이 남성 전문직 사망률의 2.4배였다. 농어업 숙련 남성 노동자의 사망률은 더 차이가 나서 전문직의 2.7배다. 직업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사망률 두 배, 세 배 차이가 나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없을 터. 건강 불평등은 심각한 정의의 문제이자 권리의 문제다. 

  누가 보더라도 중요한데 국가적, 사회적으로는 방치 상태. 건강 불평등이 그런 이유를 몇 가지 생각해봤다. 첫째, 건강 불평등, 나아가 건강은 사회 문제가 아니라 개인 문제라고 오해하는 것.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인명은 재천’이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건강과 수명은 타고난다고, 요즘 말로 하면 유전과 소질, 체질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90세를 누리는 사람과 50년을 채우지 못하는 사람 사이에 ‘사회적’ 불평등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겉으로 보이는 차이 중에는 타고난 이유 탓도 있다. 어떤 병에 더 잘 걸리는 유전자가 있고 나면서부터 체질적으로 약한 사람도 있으니, 건강과 질병에 운명적 차이가 왜 없을까. 건강 불평등은 이런 차이를 문제 삼지 않는다. 건강과 수명의 잠재력이 같은 데도 차이가 날 때 비로소 불평등하다고 한다. 잠재력을 해치는 것은 개인 외부, 주로 사회적 요소를 가리키고, (약간) 학술 용어로는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이라고 부른다. 가난, 학력, 나쁜 노동조건, 미세먼지 등. 노무직과 전문직 사이의 사망률 차이도 이런 요인들이 작용한 결과지만, 각 사람의 삶과 죽음과는 좀처럼 잘 연결되지 않는다.     

  둘째, 건강 불평등뿐 아니라 모든 불평등에 해당하는 이유인데, 불평등은 ‘실재’하지만 개인이 인식하고 경험하기 어렵다. 가난은 현상이고 사건이며 현실이지만, 불평등은 추상이고 개념이며 지식이다. 소득과 학력은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에게 돌아가지만, 소득 불평등과 학력 불평등은 개인들의 분포를 나타내는, 집단에 대해 말한다. 불평등이라는 집단의 특성을 인식하고 경험하기 위해서는 가난과 학업 중단, 고혈압을 앓는다는 개인 경험에서 한 걸음 더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셋째 이유도 여러 불평등에 같이 해당한다. 불평등은 이유와 해결 모두 사회와 체제에서 분리되지 않는다. 국가, 시장, 시민사회, 노동 등 주체들 사이의 권력관계가 빚어내는 결과물이기도 하다. 불평등에 대한 지식은 (하버마스의 말을 빌리면) ‘해방적’ 지식의 하나로 기존 체제와 권력관계를 불러내고 위협하며, 또한 해방한다. 담론이 되고 의제가 되는 것은 체계적, 체제적으로 억압된다.        

  사정은 쉽게 바뀔 것 같지 않다. 이번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도 건강 불평등이 중요 의제나 공약이 될 가능성이 적다. 불평등이 사회에서 배제되면, ‘제도화’되지 못하면, 개인과 몸이 불평등을 증언하는 법이다. 비정규 노동자의 정신건강, 가난한 농민의 자살, 가난한 사람의 술과 담배가 그런 소리라 해야 한다. 건강 불평등은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에 닿아있다. 사회적 불평등이 몸으로 발현한 것, 몸에 새겨지고 몸을 통해 증언하는 것. 불행하게도 다음 한참은 건강 불평등이 온갖 불평등을 증언하는 시대가 될 것 같다. 

글 | 김창엽 (서울대 교수·보건대학원, 시민건강증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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