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9년 전노협 건설 기념 공연 ‘노래판굿 – 꽃다지’의 장면.

  ‘민중연극운동가’였던 박인배 선생이, 지난 5월 3일 오전 뇌경색으로 별세했다. 72학번인 그는 전형적인 ‘긴급조치 세대’ 운동가로서, 마당극 운동에서 출발해, 민족극/노동극 운동을 거쳐, 집체극 운동에 이르는 운명적 궤적을 걸었다. 한데, 오늘날 하나의 정치 문화 형식으로 자리 잡은 촛불시위와, 그것이 제공하는 ‘정치적 극장이 된 광장’으로서의 서사 체제도, 그 뿌리는 과거의 마당극과 집체극에 두고 있으니, 그의 때 이른 죽음 앞에서, 여러 논점을 생각해보게 된다.

  마당극 운동의 남상점은 1973년의 <진오귀굿>이다. 이듬해인 1974년 <소리굿 아구>가 제작되며 마당극 운동은 본격화했다. 1980년대 초중반, 마당극 운동은 번창했지만, 해방 40주년이었던 1985년을 기점으로 민족극/노동극 운동이 시작되며 에너지는 분산했고, 1987년 7월 9일의 ‘이한열 열사 장례식’ 이후 정치적 구심점은 집체극으로 이동했다.

  1988년 민중문화운동연합이 ‘제1회 민중문화의 날: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과 ‘제2회 민중문화의 날: 저 평등의 땅에’를 공연하면서, 새로이 집체극 형식이 탄생했다. 노래와 독백, 시낭송, 대화, 효과음, 다큐멘터리, 슬라이드, 무용 등이 결합된 총체적인 집회-극을 통해, 소위 운동권 문화예술인들은, 투쟁의 서사를 되새기고 또 전망을 함께 공유하기를 희망했다. 그 배경엔, 민주화 투쟁이 실패했다는 판단과 그로 인한 좌절감, 그리고 그를 극복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작용하고 있었다.

  한데, 집체극에는 묘한 관습이 있었다. 여성 가수의 목소리로 청각적 소실점을 제시하고, 그의 노래를 통해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는 것. ‘제2회 민중문화의 날’에서 시작된 이러한 관습적 표현은, 이후 대다수의 집체극에서 반복됐다. 여가수가 마치 처녀 제사장처럼 이상향을 제시하는 노래를 불러, 동요된 군중을 민주 혁명의 그림(혹은 서사)과 하나로 포개는 방식엔, 기묘하게 종교적인 면이 있었다.

  고 박인배 선생은, 이러한 집체극 양식을 받아들여, 1989년 전노협 건설 기념 공연 ‘노래판굿 – 꽃다지’를 기획했고, 1990년엔 노동절 기념 공연 ‘앞으로 앞으로’를 공동 연출했다.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대표 김정환)과 서울노동자문화예술단체협의회(대표 박인배)의 공동 행사였던 ‘앞으로 앞으로’는, 집체극 운동이 어떤 정점을 이뤘던 자리였다.

  하면, 집체극의 바탕이 된 마당극의 롤 모델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김지하에게 영향을 끼친 함석헌을 주목한다. 함석헌의 씨알사상은 시오니즘의 아버지 마틴 부버를 크게 참고했던바, 20세기 초반에 유대인들이 전개했던 정치적 극장 운동—문학 연극 미술 음악 운동을 총괄했던—이, 어떤 우회로를 통해 한국에서 구현-토착화한 것으로 뵈기도 한다.

  새로운 정권의 탄생을 코앞에 둔 현재, 과제 하나가 도드라진다: “‘정치적 극장이 된 광장’에 집착하는 촛불 시위 기획자들의 세계관으로 정권을 창출한 이후, 한국 사회는 어떻게 정상적 의회 정치의 서사를 회복할 것인가?”

 박인배 선생의 공헌에 감사드리며, 두 손 모아 고인의 명복을 빈다.

 

글 | 임근준 AKA 이정우, 미술·디자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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