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를 시작하였지만, 역사가 짧은 만큼 실용적인 분야를 선택하여 집중적으로 지원해 왔다. 그 결과 학문 간 불균형이 심화되며 투자대비 효용성이 한계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선진국에선 이미 보편화된 가속기 분야에서 해외 의존도가 갈수록 심해지는 문제점도 노출되었다.

  국내 연구자들은 그동안 세계적 수준의 기초과학용 가속기를 우리나라에 건설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별 다른 결실을 보지 못하던 터에 2008년 새 정부가 들어서며 기초과학을 위한 중이온가속기 ‘라온(RAON)’을 기초과학연구원(IBS)에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현재 라온은 핵물리학을 비롯한 기초과학 연구를 주요 목표로 건설 중이며, 점차 의학, 재료, 원자력 등으로 연구 분야를 확대할 예정이다.

  현재 우주에 존재하는 핵의 종류는 가장 가벼운 수소를 비롯해 모두 120여개에 이른다. 핵은 양의 전하를 보유한 양성자와 전기적으로 중성인 중성자로 이루어지는데, 각 핵종은 정해진 수의 양성자를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수소원자의 핵은 양성자 하나, 탄소원자의 핵은 양성자 여섯 개로 구성된다. 한편 거의 모든 핵종들은 중성자의 개수가 서로 다른 동위원소를 갖고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수명이 짧아 일정 시간이 지난 후 붕괴하여 더 안정된 원소로 변환하는 방사성 입자들이다. 라온은 다양한 동위원소들로부터 전자를 떼어낸 후, 원하는 에너지로 가속하여 빔을 만드는 장치이다.

  기술적으로 방사성 동위원소 빔을 제작하는 방식에는 온라인분리법(ISOL)과 비행분리법(IF)이 있다. 온라인분리법은 양성자를 우라늄과 같은 거대한 표적 핵에 충돌시킬 때, 표적이 깨지며 발생한 동위원소를 빔으로 이용한다. 한편 비행분리법은 반대로 우라늄 등을 작은 표적 핵에 충돌시켜 빔이 깨지며 발생한 동위원소를 분리해 빔으로 이용한다. 온라인분리법은 에너지가 낮지만 동위원소 빔의 순도가 매우 높은 반면, 비행분리법은 높은 에너지의 빔을 만들 수 있지만 불순물이 많은 단점이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건설되었거나 현재 건설 중인 중이온가속기들은 연구목표에 따라 온라인분리법이나 비행분리법 가운데 하나를 채택해 왔다. 하지만 라온은 세계 최초로 온라인분리법과 비행분리법을 조합하여 높은 에너지의 고순도 동위원소 빔을 제작하고자 한다. 라온에서 연구자들은 이러한 양질의 빔을 이용해 핵물리학 실험을 중점적으로 수행할 예정인데, 몇 가지 연구주제를 아래에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과학자들은 지금까지 약 300여개의 동위원소를 발견하였다. 안정된 핵은 자연에서 발견되지만, 더 많은 핵들은 실험실에서 핵 충돌을 통해 인위적으로 생성시킨다. 그런데 핵물리 이론에 의하면 총 1만개 정도의 동위원소가 존재할 것으로 예측되므로, 앞으로 7000개 이상의 새로운 동위원소 핵이 중이온가속기 실험을 통해 발견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무거운 핵종을 새로 발견하면 이를 발견한 국가나 연구소, 발견자의 이름 등으로 명명할 수 있는데 일본의 경우 2004년에 113번 원소를 최초로 발견한 후, 2016년에 니호니움(니혼은 일본을 의미)으로 명명하여 주기율표에 등재한 바 있다.

  현재 핵물리학자들은 수소에서 시작된 핵융합 반응이 지속되어 가장 안정한 철(Fe) 핵에 이르는 과정을 비교적 잘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납(Pb)이나 우라늄(U) 등과 같이 철보다 무거운 핵이 생성된 과정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반적으로 우주의 신성이나 초신성과 같이 특별한 별들의 폭발과정에 수반되는 격렬한 핵반응을 통해 무거운 핵들이 만들어질 것으로 짐작되는데, 라온에서 여러 가지 천체 핵반응 실험을 통해 무거운 원소의 기원을 밝힐 수 있다.

  한편 라온은 중성자별 내부에 존재하는 압축된 핵물질의 구조와 특성도 연구하고자 한다. 우주에 존재하는 물질은 대부분 중성자와 양성자가 적절히 섞여 있는 반면, 중성자별의 중심에는 중성자로만 이루어진 매우 특이한 핵물질이 존재한다. 특히 중성자별 중심의 핵물질은 정상적인 핵물질보다 크게 압축되어 있으므로 핵의 붕괴과정이 변화하거나 입자들 사이에 이상한 응축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라온은 중성자 과잉 동위원소 빔을 이용하여 압축된 중성자 핵물질을 실험실에서 생성하여 특이한 핵력을 연구하고자 한다.  

  라온에는 이상에서 언급한 핵물리학 실험을 수행하기 위해 코브라(KOBRA)와 램스(LAMPS) 시스템을 설치할 계획이다. 이 실험장치들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첨단 입자 검출기를 개발하고 제작해야 한다. 현재 고려대학교는 국내의 여러 대학 및 IBS와 함께 램스 공동연구 집단을 조직하여 각 검출기 요소를 개발하고 있다. 이번에 준공된 세종캠퍼스의 중이온가속기 연구동은 국내 대학이 보유한 유일한 가속기 전문 연구시설로써 앞으로 라온 중이온가속기와 함께 관련 실험장치 개발에 커다란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램스 공동연구 집단은 중이온가속기 연구동에서 우선 향후 2년 간 중성자 검출기 시스템을 개발하여 제작, 조립, 시험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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