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은재(여•16) 씨는 유학을 가기 전 친구와 우정사진을 찍기위해 용마랜드를 찾았다. 사진 | 공명규 기자

 공사가 중단된 놀이공원, 문을 닫은 수영장, 기차가 다니지 않는 철길. 발길이 끊겼던 폐공간이 다시금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폐공간은 SNS와 대중매체를 통해 젊은 층에게 데이트 코스로, 사진 찍기 좋은 명소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뮤직비디오와 영화 촬영장소로 등장하며 더욱 인기를 끌었다. 전문가들은 젊은 세대가 폐공간을 찾는 이유로 폐공간이 주는 오래된 분위기와 자유로움을 꼽았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폐공간에서는 흘러간 세월을 몸소 느낄 수 있어 젊은 세대의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한다”며 “폐공간은 단순히 없애야 하는 공간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주는 문화적 공간”이라고 말했다.

 

나만의 놀이공원, ‘중랑구 용마랜드’
 화랑대역에서 내려 망우산 등산로에 있는 표지판을 따라 이동하면 낡은 용마랜드의 매표소가 나온다. 울창한 나무에 둘러싸인 용마랜드는 1985년 문을 열었지만, 영업허가를 받지 못해 현재 움직이지 않는 몇 개의 놀이기구만 외로이 남아있다.

 용마랜드 안쪽으로 들어가자 기울어진 디스코 팡팡과 하늘에 붕 뜬 채 움직이지 않는 회전목마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놀이기구들은 페인트가 떨어질 정도로 낡았지만, 분홍색, 노란색 등 화려한 색을 아직 간직하고 있었다. 섭씨 30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였지만 사람들이 모인 놀이기구 앞에선 페이크 다큐멘터리 촬영이 한창이었다. “다시 한 번 찍자!” 버스 모양의 놀이기구 앞에서 곰 인형 탈을 쓴 한 남자가 감독의 지시에 따라 춤을 췄다. 촬영감독 정인혁(남·21) 씨는 “영업 중인 놀이공원이 아니라서 놀이기구를 촬영할 때 훨씬 자유롭다”고 말했다.

 용마랜드는 인기 연예인들의 뮤직비디오와 영화에 모습이 등장하며 해외 팬들에게도 유명세를 탔다.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은 뮤직비디오 촬영장소를 직접 보고자 용마랜드에 들렀다. 실제로 용마랜드를 찾는 사람 중 절반가량이 외국인 관광객이다. 마카오에서 온 해나(Hannah, 여·22) 씨는 “트와이스와 비스트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오게 됐다”며 “뮤직비디오에서 본 모습 그대로라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해나 씨는 같이 온 친구와 함께 사진을 찍기 바빴다.

 용마랜드의 중앙에 위치한 회전목마는 가장 인기 있는 놀이기구였다. 멈춰있는 회전목마의 화려한 지붕과 흰색 말들은 SNS를 통해 연인들이 사진 찍기 좋은 장소로 유명해졌다. 취미로 사진 촬영을 하는 김준우(남·23) 씨는 “VR 사진을 찍는 사람들한테 용마랜드가 촬영 장소로 좋다는 입소문을 듣고 찾게 됐다”며 “겹쳐서 이어붙일 수 있는 사진을 찍기에 최적의 공간”이라고 말했다.

 녹슨 녹색 벤치에는 움직이지 않는 열차 놀이기구가 있었다. 빨간색과 노란색 등 다양한 색으로 칠해진 열차는 벤치에 앉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벤치 위에선 용마랜드가 넓지 않은 덕에 모든 놀이기구를 볼 수 있었다. 다른 놀이공원에 비해 넓지 않다는 점도 사람들이 용마랜드를 찾는 이유 중 하나였다. 용마랜드의 현준수 사장은 “용마랜드는 공간이 아기자기해서 조금만 움직여도 다양한 촬영을 할 수 있다”며 “초보자부터 전문가, 데이트 스냅 등 모든 사람이 쉽게 촬영할 수 있다”고 말했다.

 벤치에 앉아 있던 한 래퍼는 음료수를 마시며 다음 촬영에 관해 감독과 얘기를 나눴다. 촬영을 맡은 신재호(남·26) 씨는 “뮤직비디오 촬영을 위해 여러 곳을 답사해봤다”며 “용마랜드는 놀이기구의 색들이 화려하고 다양해서 힙합 뮤직비디오에 적합하다”고 말했다. 래퍼들은 직접 제작한 노래를 틀며 가사와 더 어울리는 공간을 의논했다.

 젊은 사람들과 낡은 놀이공원, 멈춰있는 놀이기구와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나이 든 용마랜드는 지금도 젊은 사람들을 반길 준비를 하고 있다.

▲ 아득한 철길, 우거진 숲. 항동철길은 도심 속 사람들에게 여유를 제공한다. 사진 | 김혜윤 기자

사람이 다니는 기찻길, ‘구로구 항동철길’
 천왕역에서 오리로를 따라 걸으면 ‘항동철길’이라 적힌 표지판이 보인다. 표지판에서 고개를 돌리면 빌라 뒤에 모습을 감췄던 항동철길이 등장한다. 이전의 항동철길은 화물철도로 이용됐지만, 철도를 이용해 물품을 나르던 비료공장이 이전해 이제는 주 1회밖에 철도가 운행되지 않는다. 기차가 떠나고, 남겨진 철로는 산책로와 출사지로 재탄생했다. 항동철길에 들어서자 일상인 듯 자연스럽게 걸어가는 고등학생과 삼각대를 들고 여러 구도로 사진을 찍는 학생이 대조를 이뤘다.

 항동철길은 교통이 편하고 사람들의 주거공간과 가까워 접근성이 좋다. 산책로로 항동철길을 자주 이용한다는 오류동 주민 고지연(여·38) 씨는 “항동철길은 서울 근교라 찾아오기 편하다”며 “친구들과 함께 왔는데 항동철길이 주는 시골적인 분위기를 재밌게 즐기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구로구는 군과 협력해 구민들이 항동철길을 더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도시계획을 수립 중이다.

 철로에 깔린 돌 소리를 들으며 걸어가면 ‘푸른 수목원’으로 가는 옆길이 보인다. 수목원 안의 사람들은 사진을 찍기 위해 자주색의 팰리스 퍼플 꽃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수목원을 나와 다시 길을 따라 5분 정도 걸으면 ‘토끼역장이’라고 불리는 토끼 세움 간판이 사람을 맞이한다. 사람들은 모자를 쓴 귀여운 분홍색 토끼역장을 만져보기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토끼역장 옆에는 슬레이트 지붕의 항동철길 역이 홀로 서 있었다. 기차가 서지는 않지만, 역 안에는 길을 걷던 사람들이 앉아서 쉴 수 있게 의자가 마련돼 있었다. 작은 의자에 앉아 개성(開城)을 향하는 표지판을 바라보면 지금이라도 기차가 올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항동철길의 끝자락에는 사람들이 천천히 걸으며 항동철길을 즐길 수 있도록 ‘00살의 나를 만나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8살 첫 등교 날’로 시작해 ‘60살 새로운 인생’으로 마무리되는 글귀를 읽으며 사람들은 걸음을 늦췄다.

 “인생 샷 찍으러 왔어요!” 항동철길은 서울에서 사진 찍기 좋은 명소로 검색하면 나올 정도로 많이 알려졌다. SNS에 올릴 사진을 찍으러 왔다는 이유리(여·19) 씨는 “사진 찍기 좋은 곳을 검색해봤는데, 그중에서 제일 가까워 찾아왔다”고 말했다. 항동철길은 사람들에게 산책로, 사진 배경을 넘어 도심에서 즐길 수 있는 여유로움을 선물하고 있다.

▲ 서울대 폐수영장으로 들어가면 다양한 그래피티가 그려진 작은 폐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사진 | 이희영 기자

화보 촬영하는 수영장, ‘서울대 폐수영장’
 서울대 유전공학연구소 역에서 내려 관악산 등산로를 걷다 보면 철조망이 무너진 좁은 입구가 있다. 그 입구를 들어가면 발길이 끊긴 버려진 건물들이 보인다. 등산로 중반에 위치한 서울대 폐수영장은 폐쇄된 지 30년이 넘어 시간의 녹을 그대로 품고 있다.

 수영장 안에 있는 여러 개의 작은 폐건물에는 ‘Soul Flow’, ‘일탈’ 등 여러 그래피티가 그려져 있다. 노란색, 파란색 등 다양한 색으로 칠해져 있는 그래피티는 서울대 폐수영장을 화려한 분위기를 내는 출사지로 만들었다. 수영장 안에는 누가 썼는지 모를 마네킹과 버리고 간 쓰레기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한때 매점이었던 작은 공간도 가격표 대신 그래피티가 그려져 있다. 그래피티와 더불어 폐수영장의 주변에 있는 관악산의 나무들도 서울대 폐수영장을 독특한 출사지로 만드는데 한몫 거든다. 서울대 사진동우회 강주연(서울대 소비자학과15) 씨는 “서울대 폐수영장에 그려진 그래피티의 선명한 색상이 내는 키치한 분위기가 가장 큰 장점”이라며 “버려진 소품과 관악산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이질적인 조합 때문에 특별한 출사지”라고 말했다.

 폐건물 사이를 걷다 보면 풀이 길게 자라 들어가기 힘든 좁은 입구가 나온다. 입구를 지나면 작은 수영장이 나오고, 긴 풀에 둘러싸여 다 벗겨진 하늘색 페인트가 칠해진 수영장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촬영을 위해 폐수영장을 찾은 사람들은 몇 개의 폐건물들을 둘러보더니 2층으로 올라갔다. 폐수영장의 2층 한쪽엔 습지가 조성돼 길게 풀이 자라있었고, 다른 쪽엔 소품이 버려진 큰 수영장이 나왔다. 수영장에 버려진 다양한 소품들은 폐수영장의 퇴폐적인 분위기를 더했다. 사진 촬영을 하러 온 한 사진작가는 “등산을 하다 이곳에서 촬영하면 좋을 것 같아 시간을 내 찾아 왔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에프엑스, 방탄소년단 뮤직비디오에 폐수영장이 등장해 많은 사람이 서울대 폐수영장을 찾았다. 본교 흑인음악동아리 TERRA의 2016년 문화정기전 영상도 이곳에서 촬영됐다.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김태형(남·25) 씨는 힙합의 강렬함과 반항적인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그는 “많은 사진작가가 찍은 사진을 통해 폐수영장을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며 “오래된 건물과 수영장이 어두운 슬럼가 느낌을 줘 힙합과 반항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고 말했다.

 물도 없고, 관리자도 없는 버려진 수영장이었지만 어떤 이들에게 이곳은 반항과 강렬함을 표현하게 해주는 문화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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