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는 주관적일까, 객관적일까? 피타고라스나 플라톤 등의 고대 철학자들은 아름다움이 대상에 내재한 비례, 조화 등 객관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근대철학자 칸트는 ‘미’ 개념을 획기적으로 전환했다. 그는 미가 즐거움이라는 감정과 결부된 주관적인 것이지, 대상의 객관적 속성과는 아무 연관도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은 개념적으로 논의할 수는 없으나 타인과 논쟁할 수는 있다”는 묘한 말을 남긴다. 가령, 우리는 “저 꽃은 아름답다”라고 말하지, “저 꽃이 나에게는 아름답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꽃에 대해 주관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저 꽃이 아름다운 것은 ‘객관적 사실’인양 말한다는 것이다. 칸트는 미에 대한 판단이 주관적이지만, 타인에게 동의를 요구할 만큼 사회적 관계와 밀접함을 간파했던 것 같다. 다만 칸트의 맹점은 인간의 사회적 관계가 역사적 조건에 따라 변한다는 점을 간과한 것에 있다. 즉 미는 주관적이면서도 사회적이며, 사회의 역사적 변화에 따라 미도 변화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외양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에 동의하도록 타인에게 요구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난 것 같지 않다. 사실 ‘동의’ 요구는 타인과 소통을 욕망하는 인간에게는 당연하다. 그런데 이 요구가 사물이 아닌 개별 인간에게 행해질 때, 나아가 인간의 외양인 ‘몸’에 대해 행해질 때 폭력적인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 특히 여성의 몸에 아름다움의 덫을 씌어온 것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오늘날 미디어에 쏟아지는 여성의 몸 이미지는, 전체로서의 한 ‘인간’의 몸 이미지라기보다는, 부위별로 얼굴도 없이 가슴과 엉덩이만으로 화면을 채우는 파편적인 ‘여성’의 신체 이미지이거나, 여성의 얼굴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 누구의’ 얼굴이기 전에 이미 아름답거나 아름답지 않은 얼굴로 먼저 판단된다. 여성의 몸은 언제나 여성의 몸이었지 중립적인 인간의 몸이었던 적이 있던가? 그것은 인간의 몸이 아니라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아름다운 몸, 아니면 아이를 출산해야하는 어머니의 몸이었다. 이 외의 몸은 상상한 적이 별로 없다. 왜 그럴까?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몸은 이 두 종류 외엔 없었기 때문일까?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몸은 잘못된 몸인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성의 몸, 보기에 아름답지 않은 몸은 어쩌다 고쳐야할 몸이 된 것일까?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것들이 왜 부정되어야 하는 것일까?

최근 미국에서는 자기 몸 긍정주의 운동이 유행했다. 이 운동은 이상적인 신체상에서 벗어난 자신의 몸을 혐오하기를 중단하려는 신체해방운동이다. 운동의 창시자는 신체의 형태, 사이즈, 색 등에 상관없이 자연스레 변화하는 몸을 받아들이면서, 몸을 사회적 미의 이상에 맞추기 위해 학대나 혐오하지 않고 자족적이며 건강한 삶을 꾸려나갈 것을 권장한다. 본래 운동 자체는 성이나 인종, 사이즈, 나이, 장애와 상관없이 모든 몸을 위한 것이지만, 유명세를 탄 것은 애슐리 그레이엄 등의 플러스 사이즈 모델의 미디어 활동 덕분이었다. 또한 이 운동을 쉽게 받아들이는 이들도 많은 경우 여성들이었다. 이는 자기신체를 혐오하는 것에 쉽게 노출되는 이들이 주로 여성들이었음을 증명한다. 매일 자신의 뚱뚱하고 잘못된 몸 때문에 고통받는 여성들에게 이 운동은 새로운 아름다움의 전형을 발견할 기회를 주는 듯 보인다.

사실 신체해방운동이 여성들에 의해 주도되는 현상은 ‘자기 몸 긍정주의’가 처음이 아니다. 1849년 아멜리아 블루머라는 여성은 최초로 여성을 위한 바지를 디자인함으로써 여성이 코르셋이라는 신체감옥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했다. 브래지어를 쓰레기통에 처박았던 퍼포먼스도 70년대 페미니즘 제2물결의 상징처럼 여전히 회자된다. 특히 이 시대의 페미니즘 예술가들은 자신의 몸을 탐구하고 실험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름답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정되고 혐오된 여성의 신체를 적극적으로 전시함으로써 수치로 여겨졌던 신체의 감각들을 깨우고 사회가 요구하는 아름다움이 얼마나 여성의 신체를 멋대로 재단해왔는지 보여주었다.

반면 자기 몸 긍정주의는 이전의 신체해방운동과 다소 결이 다른 듯하다. 그 최초의 의도는 신체의 해방이지만, 그 생각을 공유하는 이들이 정말로 해방되었는지는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애슐리 그레이엄은 ‘뚱뚱하지만’ 백인이며 콜라병 몸매에 얼굴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나마 통통한 것이 미디어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으로 자축해야 할까? 의도와는 달리 미디어와 자본은 적극적으로 이 운동을 왜곡하고, 받아들일만한 몸의 종류를 약간 확장한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또 그럼으로써 여전히 긍정되지 않는 몸들이 한 번 더 배제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플러스 사이즈 모델들을 보며 잠깐 위안은 얻을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모든 몸이 혐오에서 해방되었는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이런 미디어 현상은 변화의 첫걸음일 수도 있고, 퇴행의 도움닫기 일수도 있다.

그럼 자기 몸을 진정 긍정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여기 조심해야 할 덫이 있다. 자기 몸을 긍정한다는 것이 곧 자기 몸을 아름답게 여기는 것이라는 덫 말이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서 영원히 벗어나 있을 수도 없고, 매 순간 자신의 몸을 아름답게 여기는 것도 불가능하다. 내 몸에 대한 혐오를 덜어내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타인의 몸 또한 혐오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당신은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오늘 나의 몸을 다시 느껴보는 것이 어떨까? 몸이 아름답지 않아도 나는 충분히 나의 기쁘고도 슬픈 삶을 이 몸과 함께 영위하므로, 이 몸은 내 몸일 자격이 있다. 이제 아름다운 것은 내 몸이 아니라 내 몸을 긍정하는 나 자신이 될 것이다.

 

글 | 김남이 연구원 (여성문화이론연구소·서울대 미학과 박사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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