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김혜윤 기자 cutie@

11월의 쌀쌀한 날씨에도 강동 씨앗도서관은 여전히 푸르다. 씨앗도서관에 들어서니 푸른 경관과 함께 구수한 흙냄새가 방문객을 반긴다. 흙냄새를 좇아 눈길을 돌리면 도서관 앞 텃밭에 곧 수확할 가을 채소인 배추와 무가 눈에 띈다. 강동 씨앗도서관은 올해 구억배추, 조선배추, 무릉배추, 개성배추, 그리고 강화순무, 개걸무, 김장무를 심었다. 모두 토종 종자들이다. 밭 300평과 논 100평의 꽤 큰 규모를 자랑하는 이곳에서 키우는 작물은 대부분 토종이다. 강동 씨앗도서관의 부회장인 최윤경 씨가 씨앗도서관의 운영체계를 소개했다. “한 해 동안 일궈낸 토종 작물의 종자는 방문객에게 무료로 빌려드려요. 직접 작물을 재배해 먹는 경험도 쌓고, 토종 작물에 대한 관심도 높이며 일석이조의 효과를 내죠.”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주듯, 씨앗 도서관에서 무료로 씨앗을 빌려준다. 빌려간 씨앗은 이듬해에 10배로 반납한다. 처음 농사를 짓는 사람을 위해 채종법을 상담해주거나 종자에 관련된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동지와 정월대보름 같은 특별한 날에는 행사를 열어 방문을 유도하고 있다. 동지엔 팥죽을 쒀서 나눠 먹고 정월대보름엔 쥐불놀이를 한다. 행사는 사람들이 토종 농산물을 맛보는 기회가 된다. 그 맛에 반한 사람들이 씨앗을 빌려가기도 한다. 이번 동지에는 밭에서 한창 자라고 있는 무와 배추를 수확해 김치로 만들 계획이다. “어쩌면 요즘 개발된 품종들에 비해 토종이 맛은 뒤질지도 몰라요. 하지만 옛날 특유의 그 맛이 있잖아요. 요즘 사람들은 그 맛을 모르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토종 농산물 특유의 맛을 느끼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강동 씨앗도서관은 2012년에 자그마한 텃밭에서 시작했다. 최윤경 씨는 서울시 도시농업 기술센터에서 진행하는 도시농업 전문가 과정과 강동구청에서 진행하는 ‘토종학교’ 과정을 수료한 후, 종자의 중요성을 느꼈다. 그 후 토종학교 동기들과 모여 강동 토종 씨앗 지킴이, 일명 ‘강토지’를 설립했고, 이런 활동 소식을 들은 강동구청이 이들에게 땅과 도서관을 내줬다. “요즘에는 토종 채소나 작물을 이용한 요리에 관심을 가지면서 활동 범위가 넓혀가고 있어요.”

▲ 사진|김혜윤 기자 cutie@

강동 씨앗도서관은 오후 2시에서 6시 사이에 개방하고 있다. 수요일과 토요일에는 오전 10시에 열고 일요일에는 휴무다. 미리 전화해서 예약한 뒤, 이 시간에 방문하면 씨앗을 빌릴 수 있다. 현재 300여 종의 씨앗을 보유하고 있는데, 그 중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은 채소 씨앗이다. “바로 먹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도시에서 옥상과 같은 작은 텃밭에서도 기르기 쉬워요.”

수확 철이 얼마 지나지 않은 요즘, 강동 씨앗도서관은 씨앗 갈무리가 한창이다. 텃밭 한쪽에서는 최윤경 씨와 오종선(남·75) 씨가 얼마 전 수확한 들깨를 정리하고 있었다. 체에 흔들어 모래를 골라내고 키질을 해 겨를 날려 보낸다. 고소하고 텁텁한 들깨 냄새가 공기 중에 퍼진다. “어째 갈수록 들깨가 잘아지는 것 같아.” 냄새와 함께 농부다운 걱정도 떠다닌다. 다른 한쪽에서는 콩깍지를 까서 콩을 골라낸다. 밥에 넣어 먹는 까만 ‘서리태콩’과 된장 만들 때 사용하는 ‘메주콩’도 얼마 전 수확했다. 딱딱하게 마른 콩은 종자로 사용하고, 덜 마른 콩은 먹기 위해 구분해 나눠 담는다. 콩을 모아놓은 소쿠리에서 특유의 향긋하고 비릿한 냄새가 풍겨온다. 콩깍지는 작은 콩의 모습치고 질기지만 금방 익숙해져서 입구를 공략하는 요령이 생긴다. 한쪽에는 농작물의 종자 이외에 꽃씨도 있다. ‘메리골드’라는 노란 꽃의 씨앗으로 곤충들이 싫어하는 향기를 내뿜기 때문에 작물 주변에 심어 벌레를 퇴치한다.

“은행물거름을 담아왔는데 이게 그렇게 무거워요.” 강동 씨앗도서관 앞 텃밭 주인들도 조금씩 모여든다. 도서관 앞 텃밭에서 배추를 키우는 이 모(여·72) 씨는 은행 열매와 잎을 숙성시킨 액체비료인 ‘은행물거름’을 가져왔다. 은행물거름을 밭에 뿌리면 진딧물, 고자리팔 등의 벌레를 퇴치한다. 이 씨의 밭에는 가을작물 배추와 함께 해오리비치와 호밀도 심어져 있다. 뿌리를 깊게 내리는 해오리비치와 호밀을 겨울 동안 심어 놓으면 땅이 굳지 않는데다가 땅을 따뜻하게 지켜줘 얼지 않는다. 봄이 오면 자라난 호밀과 해오리비치가 그대로 비료가 되기도 한다. “저기 있는 분홍색 호밀 씨앗이 겨우내 땅을 지키는 나만의 비법이죠.”

마당 한쪽에서 씨앗 지키는 백구, ‘토종이’가 꼬리를 흔든다. 강동 씨앗도서관은 산 아래에 위치해 있어서 가끔 고라니가 내려와 작물을 망친다. 토종이는 이런 산짐승으로부터 강동 씨앗박물관을 지킨다. 토종이 집 옆으로 지렁이 집과 퇴비간도 지어져 있다. 지렁이가 돌아다니며 뚫어놓은 굴을 땅을 숨 쉬게 해주고, 배설해 놓은 유기물은 땅을 기름지게 해준다. 퇴비간에는 감자, 이파리, 배설물 등 여러 유기물들이 쌓여있었다. 이 중에는 인분도 있는데 생태뒷간에서 모은 것들이다. 씨앗도서관의 화장실은 옛날 재래식 화장실 그대로다. 화장실 벽에는 생태뒷간의 사용법도 적혀있다. “똥과 오줌을 따로 모아주세요. 똥은 다른 것들과 섞어 호기발효를 하고 오줌은 밀봉해 혐기발효를 합니다.”

최윤경 씨는 ‘씨앗도서관’을 이용자들이 건강도 지키고 ‘종자’에 대한 관심도를 높여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강동씨앗도서관은 ‘굶어 죽어도 종자를 베고 죽는다’는 농부들의 씨앗보존 정신을 계승한다. 다양한 토종씨앗을 보존하고 증식하는 것은 수천 년 우리 땅 우리 삶과 함께해 온 자연과 더불어 우리 자신을 지키고 미래 세대를 배려하는 소명이다. “요즘 쓰고 있는 종자에 비해 토종종자가 생산성이 적거나 맛이 덜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천천히 우리 땅에 적응하고 오랫동안 살아남은 토종종자야말로 정말 건강한 씨앗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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