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출산-양육을 잇는 연결고리의 끝엔 여성의 삶이 있다. 인권단체들이 임신을 지속하거나 중단할 권리를 기본권과 연관짓는 이유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의 11월 조사에 따르면, 낙태죄 폐지에 찬성하는 의견은 51.9%로 반대의견 36.2%에 비해 높은 수준이었다. 20대와 30대 등 청년층에서는 폐지 의견이 60%를 넘겼다. 사회적으로 임신중절 허용 필요성이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태아의 생명권이 무시할 수 없는 본질적 가치라는 측면에서 찬반 측의 대립각은 여전히 팽팽하다. 이분법적인 찬반논리 안에서는 합리적인 문제해결로 나아갈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 그래픽 | 박주혜 기자 joohehe@ 일러스트 | 주재민 전문기자


사실상 사문화된 ‘낙태죄’
우리나라는 인공임신중절 정책이 가장 엄격한 나라로 꼽힌다. OECD 회원 35개국 중 원칙적으로 낙태가 금지되고, 사회경제적 사유 또한 불가능하다고 규정된 6개국 중 하나다. 가장 최근의 우리나라 임신중절 실태 연구는 2010년 보건복지부에서 이뤄진 ‘전국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다. 연구에 따르면 2010년 기준 인공임신중절 건수는 약 17만 건이었다. 이 중 약 95%가 불법 임신중절 시술로 추정된다. 한국의 중절률은 15.9%로, 비슷한 시기 OECD 국가들에 비해서 다소 높은 수준이다. 낙태가 합법인 미국의 18.9%이나 프랑스의 17.6%에 비해서도 적지 않은 수치다.

낙태죄를 적용해 처벌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연간 20여 건 미만으로 알려져 있다. 임산부의 경우 대부분 선고유예를 받아서 사실상 처벌되지 않는다. 정현미(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 해에 수십만 명의 여성이 낙태를 하지만 검찰은 이를 파악하려는 노력도, 기소도 하지 않고 있다”며 “법과 현실의 괴리를 줄이는 방향으로 낙태죄를 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초 제정의도와 달리 낙태죄가 원한관계에 의한 보복성으로 악용되는 경우도 생긴다. 낙태 사실을 알고 있던 남성 등이 보복을 목적으로 낙태시술을 한 여성을 고발하는 등이다. 현행 형법상의 낙태죄가 사실상 사문화된 조항이란 주장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생명의 가치, 책임의식 가져라”
낙태죄가 사문화됐다 하더라도 생명존중의 풍조를 위해 낙태죄는 존치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종교계를 비롯한 낙태반대론자들은 정자와 난자가 수정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인간이 될 수 있는 생명이라 규정하고, 태아의 생명권을 가장 중요한 가치라 여긴다. 10월 30일 낙태반대운동연합은 낙태죄 폐지 청원에 대해 발표한 의견서에서 ‘낙태는 태아의 생명을 제거하는 일이며, 낙태가 합법화된다면 생명경시 풍조가 만연해질 것’이라 우려했다.

낙태는 여성의 몸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에 예방에 중점을 맞춰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가톨릭대 정재우 생명대학원장은 “낙태는 절대로 여성의 몸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며 “성행위에 대한 책임의식과 그에 따라 잉태되는 생명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 낙태율을 낮춰야 한다”고 생명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정재우 생명대학원장은 “낙태죄를 존치하면서 남성과 국가가 어떻게 생명에 대한 책임을 함께 질 것인가를 우선해서 논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 건강권과 재생산권도 고려 대상”
여성단체들은 오히려 낙태죄로 인해 여성의 건강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고 말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절을 여성이 가져야 할 근본적인 권리로서 보장해야 한다고 권고한 바 있다. ‘건강과 대안’ 이유림 연구위원은 “낙태가 불법으로 규정 돼있기 때문에 의사들마저 임신중절에 대해 자세히 배우지 못한다”며 “의사들에 대한 낙태 교육이 개원병원 등지에서 알음알음 이뤄지는 상황에서, 여성은 수술에 대한 정확한 안내 없이 위험한 시술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 안전하고 합법적인 인공임신중절의 허용이 실질적으로 임신중단률을 낮출 수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되기도 한다. 이유림 연구위원은 “엄격한 낙태 규제와 낙태율 간에는 상관관계가 없다”며 “오히려 임신 중단을 허용한 국가들의 낙태율은 공통적으로 3년에서 5년 정도의 혼란기가 지난 뒤 점차 떨어졌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임신과 출산이 여성과 아이의 삶으로 이어지는 문제인 만큼, 사회적 맥락에서 여성의 재생산권이 고려돼야 한다고 말한다. 재생산권이란 임신의 지속 혹은 중단을 선택할 권리와 더불어 출산 및 양육과정에서의 여성의 주체적 권리를 포괄하는 인권개념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성문화운동팀 박아름 활동가는 현재의 사회적 분위기를 두고 “여성의 재생산권을 인정하지 않은 채 임신중절에 대한 책임을 여성 개인에게만 지운다”며 “임신, 출산과 양육에 대해 여성이 주체적으로 의사를 결정하도록 사회적 선택지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분법에서 벗어나 ‘어떤’ 낙태일지 논의해야
최근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대립구도에 놓고 그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버려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소모적인 논쟁을 지속하기보단 생명의 가치와 여성의 권리를 균형 있게 고려해 낙태의 시기와 방법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현미 교수는 “태아의 생명권 또한 중요한 가치여서 낙태죄를 완전히 폐지할 수는 없을 것”이라며 “예외적 허용 사유를 만들고 상담을 의무화하는 등 일정한 절차를 거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낙태 허용 국가들은 임신 12주까지의 낙태는 초기 낙태로 규정하고, 24주까지는 산모의 요청에 따라 의사의 판단 아래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24주부터 40주까지는 임신중절을 하는 것이 태아는 물론 여성의 건강에 큰 위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에, 낙태보다는 익명으로 출산할 수 있는 제도와 함께 입양을 활성화하는 방식을 채택하는 국가도 있다. 낙태가 허용되는 국가들이라 하더라도 일정 임신 주수가 지나면 시술에 제한을 둔다. 낙태 시술 전 시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상담절차를 의무화하거나, 임신 확인 후 임신중지 시행까지 일정 숙려기간을 두는 등 처벌하지 않고 낙태율을 낮추는 제도를 도입하기도 한다.

낙태 허용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와 더불어 낙태를 예방하고 아이를 양육하기 좋은 사회 환경의 정립 필요성도 강조된다. 이정미 정의당 의원은 “피임교육과 피임지원시스템을 강화하고 비혼모에 대한 사회경제적 지원대책을 마련하는 등 여성이 한 생명에 대해 책임 있는 자기결정을 할 수 있는 사회 환경 또한 조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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