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히는 핸드폰, 종이처럼 얇은 텔 레비전. 불가능해 보이던 것이 어느 새 현실이 되고 있다. 기존 섬유산업 에 주로 쓰이던 고분자는 나노과학과 융합과학의 시대가 시작되며 모든 과학기술의 중심이 됐다. ‘고분자화 학의 개척자’로 불리는 진정일(KUKIST융합대학원) 전 석좌교수에게 고 분자화학은 어떤 학문인지 들었다.

- 고분자화학은 어떤 학문인가요

 “고분자화학은 이름 그대로 분자와 관련된 학문입니다. 물질의 특수한 성질을 결정짓는 가장 작은 단위를 분자라고 합니다. 분자의 성질을 좌우하는데 있어 분자의 크기가 중요하죠. 이것을 분자량이라고 하고, 분자량이 적은지, 큰지에 따라서 분자의 성질이 달라집니다. 고분자는 그중에서 분자량이 큰 분자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탄소(C)와 수소(H)가 1:2 비율로 결합된 CH2 분자는 기체입니다. 하지만 분자가 5개 결합돼 있으면 액체의 성질을 가지죠. CH₂ 분자 천 개가 결합되면 어떻게 될까요? 신기하게도 그것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왁스입니다. 이것이 만 개가 결합되면 플라스틱이 되죠. 이처럼 화학적인 조성은 같아도 분자량에 따라 물질은 그 모습을 달리합니다. 분자가 커지면 접하는 면적도 커지고 이게 길어지면 꼬이곤 합니다. 즉 고분자화학은 저분자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물질의 특성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고분자화학은 최근 의료와 전자기기에 핵심적인 기술로 떠오른 나노기술에도 큰 기여를 할 수 있습니다. 저분자는 1나노미터보다 훨씬 더 작아 관찰하기 어렵지만 고분자가 되면 나노 메타 영역에 들어가 분자 고유의 특성을 볼 수 있죠. 섬유산업에서도 고분자화학은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잘 때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고분자를 접합니다. 비단 같은 섬유와 목재를 이용한 가구는 물론이고 단백질과 탄수활물 역시 천연 고분자거든요. 아침에 눈을 떠 양치를 할 때를 생각해보세요. 칫솔의 솔과 대, 안경까지 고분자가 아닌 것이 없죠. 따라서 고분자화학은 우리가 삶에서 사용하고 만나는 모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고분자에는 어떤 종류가 있나요?

 “제일 먼저 ‘액정고분자’가 있어요. 액정이란 액체와 결정의 중간 상태예요. 조금 더 설명하자면 액체는 분자의 규칙성이 없지만 결정은 분자의 규칙성이 있습니다. 규칙성이 없는 액체와 규칙성이 있는 액체의 중간 상태, 그것이 바로 액정이죠. 액정고분자 하면 휴대폰의 액정만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 몸의 DNA도 액정고분자입니다. 모든 생물이 DNA를 갖고 있는 만큼 DNA의 액정고분자 성질을 이용한 연구가 최근에 진행되고 있죠.

 다음은 ‘전도성고분자’가 있어요. 보통 플라스틱을 절연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화학 구조를 어떻게 설정하는지에 따라 플라스틱에서 전기가 통하기도 합니다. 최근 전도성고분자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며 일부는 이미 사용되고 있어요.

 디스플레이에 쓰이는 ‘전계발광고분자’도 있습니다. 화합물이 전기 속에 들어가면 빛을 내는 거죠. 만약 플라스틱으로 디스플레이가 개발되면 종이처럼 얇은 텔레비전도 실현될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전기, 기계 등 모든 분야에서 고분자화학이 중요합니다. 21세기가 융합과학의 시대인 만큼 융합과학의 중심인 고분자화학이 모든 과학·기술 분야에서 윤활유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 고분자화학의 최근 추세는 어떤가요

 “최근 IT 업계에서는 접히는 스마트폰을 개발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이 때 플라스틱이 핵심적이죠. 유리는 접힐 수가 없으니 기업에선 플라스틱 기판을 고민할 수밖에 없죠. 이미 전자재료에는 플라스틱 소재를 많이 사용하고, 전자소재의 아주 작은 부분을 만드는데 액정고분자가 이용되고 있습니다. 삼성은 이를 수출까지 하죠. 스칸디나비아에는 플라스틱으로 건설된 다리도 있습니다. 섬유보강 플라스틱을 이용해서 비행기, 레이싱 카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고분자화학이 이용되고 있죠. 고분자화학의 대표적인 물질인 플라스틱이 매우 가볍다 보니 교통 분야에서 이용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의료 분야에서는 플라스틱을 이용해 연골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사람이 늙으면 앞으로 뇌와 플라스틱밖에 남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나올 정도죠.

 이렇게 산업은 발전하고 있지만 동시에 고분자화학은 큰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합성고분자를 많이 쓰니 쓰레기 문제가 생기고, 자연스레 석유 사용량이 많아진다는 것이죠. 석유가 없으면 석유화학산업이 없어지고 고분자화학은 위기에 빠집니다. 그 외에도 합성고분자 제품은 잘 썩지 않아 자연을 훼손시키는 문제도 있습니다.”

 

- 어떤 계기로 고분자화학을 연구하시게 됐나요

 “1966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선 일부 공과대학에서 고분자 과학을 가르쳤을 뿐, 화학과에서는 전혀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유학을 갈 당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이 저한테도 그리고 국가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분자화학이 실생활과 밀접히 연관돼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었죠.

 이후 고분자화학에서 여러 분야를 연구하다 1980년대부터 액정고분자 연구에 뛰어들었습니다. 당시 세계적으로 액정고분자에 대한 연구를 시작할 단계였습니다. 액정고분자를 연구하며 자연스럽게 전도성고분자도 함께 연구했습니다. 나노 크기의 탄소 튜브를 만들어 금 입자를 전기장에 넣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연구했죠. 유네스코 메달은 나노과학 발전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수여되는데 이런 제 초기 연구가 나노과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나노과학이란 말이 대중에게 알려지기도 전에 그 분야를 연구했으니까요. 그러다 추천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제가 후보가 됐는지도 모른 채 유네스코 메달을 수상하게 됐습니다. 참 재미있는 일이죠.”

 

- 교수님께서는 화학의 대중화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해오셨나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비단 학생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화학을 쉽게 접하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이 과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과학을 재밌는 것으로 여겨 과학문화를 확산시키고 싶었죠. 사회에선 항상 과학을 특정 기술하고만 연결해 경제 발전의 도구로만 이용하니까요.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과학이 아닌 게 없습니다. 학자만이 아니라 일반인도 어느 정도 과학을 알고 있어야 기술의 편리함도 제대로 누릴 수 있죠. 그런 의미에서 <詩에게 과학을 묻다>, <교실 밖 화학 이야기> 등 책을 집필해 화학과 문학을 결합하거나, 쉽게 화학의 원리를 설명하려고 노력했죠.

 물론 처음에는 많이 고생했습니다. 2000년에는 EBS에서 생활 속의 화학을 주제로 강연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원고를 쓰고 작가님께 드렸는데 작가가 깜짝 놀라더군요. 작가가 공부를 해도 이해를 못하겠다는 겁니다. 작가가 학교 2학년 수준으로 원고를 써달라고 말했죠. 덕분에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과 소통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었어요. 최근에는 초등학교 4학년인 손녀의 학급에서 강연을 한 적도 있어요. 과학자들이 세상과 언어로 소통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국가 차원에서 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부는 결국 정치인들이 구성하잖아요. 그러다보니 어떻게든 임기 내에 성과를 내려고 하죠. 대부분의 사안에 대해 근시안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어요. 기초의 발전이 있어야 혁신이 일어나는 것인데 기초과학의 발전은 등한시하고 당장의 경제 성장률 높이기에만 급급하죠. 기초과학이 어떻게 1년 만에 세상을 바꿀 업적을 낼 수 있겠어요? 과학을 경제의 예속물로만 바라보는 시선은 잘못됐습니다. 한국의 학자들이 노벨상을 왜 수상하지 못하는지 매일 얘기하면서 당장 논문을 몇 개 쓰는지에 연연하는데 당연히 기초과학의 발전이 정체될 수밖에 없죠.”

 

- 40년 동안 고려대 교수로 재직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일화를 꼽는다면

 “기억에 남는 건 제가 고려대학교 처음 온 1974년입니다. 귀국을 했는데 정말 충격을 받았어요. 과학 실험실에 아무 것도 없었거든요. 화학 실험실의 기초인 진공 펌프가 없을 정도였으니. 근데 그게 전국적인 현상이었습니다. 미국 같은 선진 실험실에서 연구하다 한국에 와보니 정말 충격적이었죠. 그 때 참 많이 울었어요. 당시 학생들에게 너무 고마웠습니다. 실리콘 오일을 사야 하는데 살 돈이 없으니까 콩기름으로 실리콘 오일을 대신해 실험했죠. 돌이켜보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콩기름은 불포화 지방이라 공기에 반응하면 다 굳어버려요. 그런 것들을 마다하지 않고 정말 연구 열심히 해준 학생들. 아직도 그 시절 제자들을 많이 만납니다. 공식 정년이 끝났을 때는 제자들과 <고분자화학 연구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를 같이 집필했을 정도니까요.”

 

- 후학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첫 번째는 현실에 충실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을 충실히 살면 과거가 아름답고 미래가 준비됩니다. 지금 충실하지 않은 채 과거가 곱기를 바라고 미래가 아름답기를 바라면 심하게 말해 사기인거죠. 두 번째는 ‘처염상정’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더러울 지라도 항상 깨끗해 있어야 합니다. 부정과 불의에 타협해선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진인무구’입니다. 참다운 사람은 먼지조차도 남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세 말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기본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의 기본,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기본, 직업인으로서의 기본. 그것에 충실해야 합니다. 저는 고려대학교에서 이것을 잘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학교 다니는 동안이라도 고려대학교 이 훌륭한 학풍을 몸에 익히기를 바랍니다.”

 

학자소개

 진정일 전 석좌교수는 ‘고분자화학의 개척자’로 불린다. 진정일 교수는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1969년 뉴욕시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4년부터 시작해 화학과, 융합대학원에서 40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친 진정일 교수는 2012년부터 2013년까지 융합대학원장을 맡았다. 이밖에도 한국과학문화진흥회 회장, 국제순수 및 응용화학연맹 회장을 역임했다. 2016년에는 나노과학과 나노기술 발전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인 최초로 유네스코 메달을 수상했다. 현재 진정일 교수는 융합대학원 석좌교수, 미국화학회 석화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진정일 교수는 화학의 대중화를 위해 <과학쌈지>, <교실 밖 화학 이야기> 등의 책을 집필한 바 있다.

 

글·사진|공명규 기자 zerom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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