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제민 작가가 자신의 연구실이자 화실에서 드로잉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어디든 정 붙이고 사는 곳이 집이다(I Call it Home)’ 깨진 건물 모퉁이 틈새를 비집고 자라난 몇 가닥의 무심한 풀이 매력적인 작품이다. 쓸모없는 풀이라며 쉽사리 쳐내지던 잡초가 예술의 대상으로 다시금 탄생했다. 바쁜 도심 곳곳에 느닷없이 등장한 자연의 일부를 때론 코믹하게, 때론 신비롭게 표현하는 김제민(동양사학과 91학번) 교우는 풀이라는 객체를 통해 자신의 예술세계를 자유롭게 표출하고자 한다. 예술가이자 교육자인 그는 강의와 작품 전시회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도시와 잡초의 공생, “흥미로워”

  현재 전남대 미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김제민 작가는 도시 속 예상치 못한 곳에 자리 잡은 식물들을 무심코 지나치지 않는다. 산과 풀을 쉽게 접했던 수유동에서의 어린 시절은 그의 작품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김 작가는 외진 구석의 콘크리트에서, 무너진 담벼락에서, 두꺼운 아스팔트에서 삐죽 고개를 내민 잡초들의 다양한 모습들을 그림으로 담아냈다. “뜻밖의 장소에 뜻밖의 형태로 등장하는 풀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제 나름대로 해석했습니다. 시각적으로는 단순하면서도, 의미의 층엔 깊이가 있길 바라죠.” 김제민 작가는 작품을 보는 사람이 너무 진지해지지는 않으면서도 한 번쯤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면 성공이라고 말했다.

  “거친 외부환경을 버텨내는 잡초의 끈질긴 생명력과 꿋꿋함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마치 도시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모습과 닮았달까요.” 도시라는 인공적인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잡초의 모습은 그에게 매력으로 다가왔다. “도시 속 풀들은 자생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도시로 옮겨 온 후 끝없이 적응하며 살아가죠. 공사장에 핀 풀도 그곳에 내리쬐는 햇볕을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인공 속에 자연의 일부가 어우러진다는 것, 그 공생관계가 참 흥미로워요. 도시의 무채색에 끼어든 초록색 풀, 생물과 무생물의 극명한 색상 대비가 아름답죠.”

  김제민 작가는 어디로 어떻게 자랄지 알 수 없는 풀을 드로잉 기술에 비유하기도 했다. 김 작가는 주로 연필, 펜, 먹물, 건식재료 등으로 라인을 나타내는 드로잉 작업을 선호한다. 화실 한구석에 검은 먹물로 거칠게 표현된 무성한 풀밭의 작품이 눈에 띈다. “계획한 후 밑그림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것이 페인팅이라면, 드로잉은 즉흥적으로 생각이나 느낌을 지면에 바로바로 표현하는 기술입니다.” 2016년에 열린 김 작가의 여덟 번째 개인전 ‘원더-풀 라이프(Wonder-Pul Life)’에서 전시된 ‘무심한 풍경(Inadvertent Landscape)’이 그의 드로잉 대표작 중 하나이다. “무심한 풍경은 도시 주변에서 도시를 바라본 작품으로 의미보다는 드로잉이라는 행위와 방식 자체에 몰두한 작품입니다.”

▲ Usual Suspects, 종이에 수성마카 43x75.6cm

“잡초에게 근력운동을 시켜줬어요”

  크리스토퍼와 파멜라. 김제민 작가가 유럽 방문 당시 만난 식물들에게 붙인 이름이다. 지극히 평범한 잡초의 모습이지만 그는 이들 하나하나에 인격을 부여했다. 작품 속에서 의인화된 풀들은 각기 다른 이름과 성격을 지니고 있다. 김제민 작가는 놀이의 일환으로 작업했다는 ‘잡초 끈질긴 생명력 기르기’ 시리즈를 소개했다. “진지한 작업도 중요하지만 ‘유희’라는 것도 중요합니다. 유치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좋아하는 것을 여러 방식으로 맘껏 가지고 놀다 보면 새롭고 참신한 것들이 튀어나오기도 하죠.” 나약한 잡초들에게 힘을 길러주자는 발상이었다. 러닝머신을 타는 등 여러 헬스기구에서 운동하는 잡초들이 인상적인 시리즈 작품이다. “업신여겨져 뽑혀나가는 잡초에게 힘을 키워주기 위해 운동도 시키고 무술도 시켜봤어요. ‘불필요한 잡초’,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찍힌 식물의 입장에서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힘을 길러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하면서 재밌게 풀어 본 작업입니다. 새로운 영감과 방향을 찾는데 기점이 됐기에 특별히 애착이 가기도 하죠.” 김제민 작가는 건강을 위해 지친 몸을 끌고 헬스장으로 향했던 자신의 모습을 담아내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각박한 현실 속에서 모종의 차별 혹은 분류를 당하면서 끈질기게 살고자 하는 인간의 이야기를 풀로 비유적으로 한 것이기도 합니다.”

▲ 야근, 캔버스에 아크릴, 53x45.4cm

교육자의 길, 또 다른 전환점

  한국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김제민 작가는 서구적인 외모로 어린 시절 괴리감을 느꼈던 경험에 대해 털어놨다. “남들이 외국인이라고 부르면 외국인이 되는 것 같아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어요. 내적으로 소심해지기도 했지만 극복하는 법을 배웠죠.” 그는 다양한 모습으로 도시에서 살아가는 풀이 자신과 닮았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제 작품에 소수와 다양성에 대한 존중을 투영하고 싶기도 했습니다.”

  본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한 김제민 작가는 서울대 서양화과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신문 만평을 보며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그는 뒤늦게 자신의 재능을 깨닫고 화실에 다니며 다시 입시 준비를 했다고 회상했다. “기존 전공인 동양사학에서 미술로 진로를 변경한다는 것이 처음엔 벼랑 끝에 선 것 마냥 두려웠어요. 하지만 화실에서 입시까지 매순간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하며 차근차근 목표에 다가서니 여기까지 오게 됐죠.”

  교육자로서의 길에 접어든 지금은 그의 삶에 있어 또 다른 전환점이다. 김 작가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물론, 학생들로부터 영감을 얻기도 한다. “흔히 선생의 입장에선 학생들을 가르쳐야만 하는 대상으로 보기가 쉬운데, 미래의 예술계와 사회를 주도해나갈 사람들인 만큼 그들의 생각을 경청하고 그 세대의 문화에서 배움을 얻기도 합니다. 학생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그들의 성장을 돕는 지금이 제 인생의 또 다른 전환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미술에선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기존의 것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해요. 이를 위해선 역사와 배경, 큰 그림을 알아야 합니다. 그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야 하는 것입니다.” 김제민 작가는 후배들을 위한 따뜻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평생 재밌게 할 수 있는 것이 뭔지 고민해보세요. 좋아하는 일을 찾아보세요. 항상 원하는 대로 되진 않아도 계속 꿈을 꾸길 바랍니다.” 

 

글 | 유제니 기자 jenerous@

사진제공 | 김제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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