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선 다른 세계로 통하는 ‘비밀의 문’이 있다고 믿었다. 해리포터를 너무 많이 본 탓이었을까. 인간세계에서 호그와트로 가는 킹스크로스역 9와 3/4 정거장과 같은 곳이 어딘가에 있겠거니 상상하곤 했다. 을지로3가역 10번 출구 인쇄 골목에 바로 그런 마법 같은 통로가 있다. 위치를 알려주는 싸인은 로고가 그려진 자그만 합판이 전부인 그 곳. 적막한 인쇄소 거리 속 허름한 건물의 칙칙한 철문을 여는 순간 다른 공기가 훅 새어 나왔다.

  은밀한 공간으로 발을 디디면 제일 먼저 홍콩 호텔 풍의 프런트를 마주하게 된다. ‘호텔수선화’는 침대 없이도 ‘호텔’이라는 단어의 설렘만큼은 가득 담았다. ‘수선화’는 이 공간을 함께 시작한 세 동갑내기 디자이너들을 나타낸 말이다. 주얼리, 패션, 가방을 디자인하는 세 디자이너들의 작업실이자 카페로 출발한 이곳은 작년 초 두 명의 디자이너가 독립하게 돼 현재는 주얼리 브랜드 파이(π)의 원혜림(여·32)씨가 운영하고 있다.

  디자인 작업은 보통 낮 시간에 많이 진행된다. 어둑한 저녁엔 그녀가 오전까지도 일하고 있었을 작업 공간이 손님을 반겼다. 아직 완성되지 못한 은반지 조각들이 이곳저곳 흩어져있고, 작업 테이블엔 조각기와 줄, 망치 등의 공구가 가지런히 늘어서 있다. 취향에 맞는 음료를 곁들이며 코앞에서 디자인 작업을 눈으로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이 공간의 장점 중 하나다. 디자인 작업뿐만 아니라 원혜림 씨가 직접 기획한 다양한 전시회, 프리마켓 등의 행사가 진행된다. “수선화의 가장 큰 매력은 영화 상영, 파티 등 문화공간으로서 역할을 할 때에요. 단순히 음료를 파는 공간이 아니라 재미난 일들이 일어나는 공간이죠.” 갈 때마다 벽에 걸린 작품들이 달라지고, 작업 공간도 조금씩 변한다.

  칠 벗겨진 시멘트벽을 가득 채운 화려한 조명들은 이런 수선화의 분위기를 돋우는 역할을 한다. 공사를 위해 칠을 벗겨놓은 시멘트벽은 낡고 오래된 느낌이 좋아 그대로 두었다. 철근과 전선이 군데군데 삐져나와있고 천장엔 멀티탭을 길게 늘어뜨린 도르래까지 달려있다. 이런 찬 시멘트벽에 화려한 꽃무늬 전등 빛이 감돌면 레트로한 펍으로 변신한다. 이곳에서 손님들은 이 낯선 공간이 주는 희한한 편안함에 마음껏 대화 나누고 장난치고 있었다. “와 이거 진짜 칠 수 있는 건가?” 80년대에나 쓰였을 타자기부터 벽 곳곳에 붙어있는 일본, 홍콩 등 해외잡지까지 어딘지 촌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소품들은 쏠쏠한 구경거리다.

  구석엔 을지로를 내려다볼 수 있는 작은 발코니도 마련돼 있다. 반짝이는 조명과는 대조되는 회색 거리를 내려다보며 현실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 나른하게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는 철문 뒤로 숨고, 다시 서울 을지로3가 속 허름한 계단이다. 예술이 숨은 오묘한 공간으로 통하는 이 비밀의 문은 오늘도 조용히 그곳에 있다.

 

글‧사진 | 박규리 기자 curi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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