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히 바라면 우주가 도와준다는 식의 격언은, 열심히 욕망하고 힘차게 노력하면 결국 성취를 얻어내는 것이 바람직한 대자연의 순리라는 낙천적 세계관을 드러낸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실제 세상사는 그보다는 조금 더 매우 많이 미묘하다. 사소한데 강렬한 욕망, 민폐적 노력이 세상이 얼마나 넘치던가.

  <스위트 홈>(김칸비, 황영찬/네이버) 은 온 가족을 잃은 은둔형 외톨이 차현수가 특정일에 죽을 것을 결심하고 한 오피스텔에 입주했다가, 갑자기 사람들이 변한 괴물들의 습격을 받게 되는 이야기다. 기본적으로 ‘좀비 아포칼립스’ 생존물 장르 코드인 셈인데, 정작 괴물들은 고작 인육이나 탐하는 시체인 좀비와는 비교도 안 되게 끔찍하다. 그저 흉악한 겉모습 때문에 끔찍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 여기 등장하는 괴물들이, 모태가 된 그 사람이 간절하게 원하고 노력하던 어떤 속성이 극단적 욕망으로 폭발해버린 어떤 형태이기 때문이다.

  감량을 하느라 뭔가를 먹고 싶은 욕구를 필사적으로 억누르던 사람이 괴물이 되자, 배고픔을 채우려고 사람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으려 한 것이 이런 패턴을 알려주는 힌트였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독자는 각자의 독특한 개성적 방식으로 사람을 해치려는 모든 괴물이 등장할 때마다 어떤 욕망이 발현된 것인지 추리하게 된다. 극단적으로 비틀어진 그 간절함을 스스로 생각해봐야만 하는 것이, 무언가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식의 놀라게 하기 기법과 수위가 다른 공포가 된다. 거대한 근육질에 프로틴을 찾으며 사람들을 해치는 괴물을 보며 그가 인간이었을 때 몸 만들기에 열중했으리라 유추하고, 거대한 눈으로 사람들을 지켜보는 괴물을 보며 훔쳐보기에 빠진 사람을 연상해야 한다. 그리고 괴물의 씨앗이, 지극하게 평범하고 흔한 사람들의 모습임을 되새김질하는 것이다.

  전작 <후레자식>에서 작가팀이 선보였던 긴장감의 연출력은 이 작품에서 더욱 큰 효과를 발휘한다. 괴물들의 말투를 낱소리로 해체하여 괴기스러움을 극대화하는 미학적 접근부터, 생존자들이 교신하는 화이트보드 밑에 썼다가 지운 글자의 잔상을 남겨서 상황의 현실감을 만드는 세심함까지, ‘웰메이드’라는 수식어가 당연하다.

  이야기의 관건은, 차현수 또한 괴물화의 초기 증세가 나오는 것이다. 비뚤어진 성격의 은둔형 외톨이고, 인터넷으로 위악적 악플을 남기는 것이 소일거리며, 열중하는 애니메이션 시사회를 제 때 보는 것이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인 사소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지만, 욕망이 없는 인간은 없다. 일부 생존 주민들이 몇 개 그룹으로 고립된 오피스텔에서 조금씩 타인을 돕기 시작하지만, 동시에 언제 괴물이 될지 모르는 상황이 자아내는 긴장감이 일품이다. 자신이 품고 있던 욕망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그 순간, 그것이 개성으로 변모한 괴물이 될 것이다.

현수의, 아니 어쩌면 우리들 자신의 그 괴물화하기 일보직전인 욕망은 과연 무엇일까. 어쨌든, 뭔가를 너무 무턱대고 간절하게 바라면 안 될 것 같다.

 

글 ㅣ 김낙호 만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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