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 속에 숨지 않고 삶을 운전해 나갈 거예요”

배우 예수정(독어독문학과 73학번) 인터뷰 조한규 기자l승인2018.06.06l수정2018.06.06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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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정 씨는 꾸준한 자기계발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영화 <신과함께-죄와 벌>에서 아들 김자홍(차태현)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주는 어머니 역으로, 영화 <부산행>에서 자매의 깊은 우애로 관객을 울린 할머니 역을 맡은 배우 예수정(독어독문학과 73학번) 씨는 영화와 드라마, 무대에서 45년간 연기 중인 중견 배우다. 1979년 연극 <고독이란 이름의 연인>으로 데뷔한 예수정 씨의 집안은 어머니는 배우, 딸은 연출가로 3대가 연예계에 몸담고 있는 예술가 집안이다. “시민을 계몽하는 연극을 위해 무대에 섰어요.” 예수정 씨의 연기는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 시작됐다.

독문과 학생에서 연기의 길로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이 길에 접어들진 몰랐죠.” 예수정 씨는 본교 독어독문학과에 진학할 때만 해도 연기에 생각은 크게 없었다. 연기에 대한 생각은 대학교 1학년 때 영화 <대부>의 말론 브랜도(Marlon Brando)를 보며 시작됐다. “아이와 함께 간 꽃밭에서 조용히 쓰러지는 말론 브랜도의 연기에 감동했어요. 영화관에 다섯 번이나 가서 다시 볼 정도였죠. 배우를 보러 영화관에 자주 가다보니 연기가 흥미로워지기 시작했어요.” 예수정 씨는 말론 브랜도의 연기를 닮고 싶어 그 길로 남산에 위치한 주한독일문화원을 방문했다. “연기를 배우기 위한 곳을 찾던 중 주한독일문화원을 찾았어요. 때마침 독일문화원 소속 극회 프라이에 뷔네(Freie Buehne)가 공연을 준비하고 있어 연극 <깨어진 항아리>에 참여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지요.”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극장을 ‘시민을 계몽하는 공간’이라 불렀다. 이 말은 예수정 씨의 연기생활 내내 가슴을 뛰게 했다. “브레히트의 말을 듣고 무대에서 일하겠다는 결심이 섰어요. 연극에 대해 더 알아보기 위해 독일로 유학을 간 것도 이 말이 큰 계기가 됐지요.”

  예수정 씨는 대학교 3학년 헨리크 입센(Henrik Ibsen)의 <유령>을 같이 해보자는 한 선배의 권유로 본교 중앙연극동아리 극예술연구회에서 졸업할 때까지 활동했다. 예수정 씨는 동아리에서 <유리동물원>, <유령의 집> 등 많은 작품을 연습하며 즐거운 추억을 쌓았다. 1976년 선후배 합동공연으로 진행했던 연극 <맥베드>에서 일어난 일은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무대예술 전문가인 조용래 선생님께서 무대를 설치하러 오시자 관객이 몰려왔어요. 자리가 다 찼는데도 관객들이 창문으로 더 들어오려고 하더라고요. 결국 창문이 깨지고 말았죠.”

  예수정 씨는 딸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할까 걱정한 어머니의 반대로 처음에는 연기 활동을 자유롭게 하지는 못했다. 대학교 졸업 이후 대학원 생활을 하며 몰래 연기 생활을 이어간 것도 이 때문이었다.

  “어머니, 수정이 연극해야 합니다.” “딸에게 응당한 대접을 해주게.” 예수정 씨가 자유롭게 연기를 시작하게 된 것은 연극 <봄이 오면 산에 들에>에 그녀를 캐스팅 한 유덕형 연출가가 직접 어머니를 설득한 이후부터다. 현재 서울예대 총장인 유덕형 연출가는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유치진 씨의 아들로 당시 최고의 연출가 중 하나였다. 유 연출가는 몰래 연기를 하고 있다는 예 씨의 사정을 듣고 “예술가는 자유로워야 한다”며 그 길로 그녀의 어머니가 계신 집으로 찾아갔다. 유덕형 연출가가 예 씨의 연기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어머니는 허락 여부가 아닌 그녀를 잘 챙겨달라는 얘기를 했다. “캐스팅만으로도 영광이었는데 어머니께서 저를 잘 대우해달라는 이야기를 하셔서 창피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이때의 이야기가 제대로 연기하게 된 기틀이 됐죠.”

▲ 유덕형 연출가의 공연 <봄이 오면 산에 들에>에서 열연하는 배우 예수정(1980)

평범한 일상에서 다시 무대로

  “유학에서 돌아오니 당장 눈앞에 놓인 시민사회의 문제가 보였어요.” 예수정 씨는 8년간의 독일 유학을 마치고 바로 연기를 시작하진 않았다. 아이가 생기고 생계를 꾸리다 보니 주변 삶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평범하게 살던 예수정 씨는 2년간 소비자신고센터를 다니며 초등학교 특별활동 교사와 반상회 반장까지 자처했다. “제게 연극은 사회를 떠나서는 의미가 없는 거였어요. 코앞에 해결할 것들이 너무도 많아 보였어요. 연극을 할 시간은 없다고 생각했죠.”

  “뭔데 이런 걸 붙이냐?” 일상 속에서 다양한 작은 활동을 이어가던 예수정 씨는 한 사건을 계기로 연극 무대로 돌아오게 됐다. 초등학교에서 특별활동 교사로 활동하던 예수정 씨는 불법주정차 된 차량에 아이들이 다칠까 염려해 불법주정차차량에 ‘여기는 주정차 구역이 아닙니다. 차가 보이지 않아 아이들이 위험합니다.’라는 쪽지를 써 붙이곤 했다. “어느 날 한 아저씨가 어디다 이런 걸 붙이냐며 화를 냈어요. 아이들이 다치니 주차하면 안 된다고 하자 ‘내가 어디 다니는 줄 아냐’며 오히려 저를 다그쳤죠.” 이 사건으로 크게 놀란 예수정 씨는 남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다쳤으면 어쩔 뻔했어.’ 남편이 저에게 가장 먼저 한 말이에요.” 이야기를 나눈 후 남편은 연기 생활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다. “저도 연극무대에서 사람 이야기를 하는 게 제가 맡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렇게 해서 시민 계몽의 공간이라 생각했던 극장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지요.”

▲ 예수정 씨는 원하던 '강한 캐릭터'를 연극 <엘렉트라>에서 연기했다.

연기와 삶에 대한 생각

  영화 <신과 함께-죄와 벌>에서 농아인 엄마 역할로 나온 예수정 씨는 촬영장에서도 웬만하면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적극적인 자세로 대화하는 평소와는 다른 영화 속 역할을 잊지 않도록 더 조심했던 것이다. “저는 메소드 연기는 잘 못해요. 그래서 연기하는 동안에는 주어진 연기 상황을 제 상황처럼 생각하죠. 촬영을 마칠 때까진 실생활에서도 연기 역할에 대한 생각을 놓치지 않으려 하는 편이에요. 그런 과정 없이 갑자기 연기 역할에 몰입하려면 백두산에서 에베레스트를 오가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아요.”

  최근 예수정 씨는 고대 그리스 작가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원작으로 한 연극 <엘렉트라>에서 엘렉트라를 돕는 게릴라 중 한 명으로 출현했다. 게릴라 역으로 맡았던 ‘강한 캐릭터’는 그녀가 꼭 해보고 싶었던 역 중 하나였다. 예수정 씨는 <엘렉트라>에서 코러스 역할이었지만 자진해서 역할에 지원했다. “어머니 역할을 벗어나 독특한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었어요. 노년의 형사 같은 새로운 역할이요. 마침 시기가 맞아 도전할 수 있던 건 행운이었죠.” 그녀는 <엘렉트라>에서도 상황에 몰입하기 위해 그리스를 다녀왔다. 거친 게릴라 역을 소화하기 위해 후배들에게 막을 내릴 때까지는 반말을 사용하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막상 그리스에 다녀오니 연극에서는 게릴라 역할이어서 그리스 문화랑은 별로 상관이 없더라고요. 그래도 새로운 캐릭터를 맡아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몰라요.”

  예수정 씨는 연기 역할에서 나아가 실생활에서의 역할 행동에 대한 생각이 확고하다. 할머니, 어머니 등 가족 내에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도 자기계발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버세대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노년층이 많아진 사회이기에 더욱 역할 속에 숨으면 안 된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연기에서도 젊은 여성들은 다양한 역할이 있잖아요? 그런데 장년기에서 노년기 여성은 가족에서의 역할을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요. 인생은 죽는 날까지 계몽하면서 살아야 해요. 삶을 운전해 나가는 거죠. 나이가 들어도 꾸준한 자기 발전으로 나다운 삶을 챙겨야죠. 자기 자신이 없어지면 결국 주변 사람에게 부담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글‧사진|조한규 기자 honeyq@

사진제공|예수정, 서경스타

조한규 기자  honeyq@kunew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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