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한국 문학의 거목, 작가 최인훈이 별세했다. <광장>과 <화두> 로 대표되는 그의 작품들은 당대 한국의 특수한 역사적 현실 속에서 개인이 겪는 혼란을 묘사하고, 이를 기반으로 인간 실존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들을 던진다. 이러한 그의 작품 경향은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겪어낸 그의 삶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작가의 문제제기는 그의 개인적 체험에서 비롯하기에, 소설 속 인물들이 겪는 사건은 근대화 과정에서 작가가 겪은 혼란이 변형된 형태로 나타난다.

  <웃음소리> 또한 그의 경험이 투영된 열다섯 편의 단편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모든 작품들이 각각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아이디어들로 ‘인간 실존’이라는 화두를 구체화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세 가지의 단편을 통해 작가의 자기성찰 과정을 읽을 수 있다.

  <웃음소리>에 수록된 <라울전> 은 근대화의 경험을 통해 작가가 느낀 무력감을 표현한다. 지적인 힘을 믿는 라울은 운명적이고 비논리적인 신의 뜻을 의식적으로 부정하고 탐구를 통해 신에 가까이 다가가려 하지만 끝내 좌절하고 포기한다. 부조리한 외부 세계에 의해 자신의 의지, 즉 주체성을 빼앗긴 라울은 광기에 미쳐 죽는다. <grey 구락부 전말기>는 이러한 현실로부터 자아를 지키기 위해 관조적인 태도를 취하는 개인들의 모습을 제시한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얼마간은 이를 유지하는 듯 보이지만, 소외를 견디지 못하고 어김없이 무너지고 만다. 그렇다면 작가는 근대화의 과정에서 비롯하는 소외의 문제에 해답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작가는 또 다른 소설로 질문에 답한다. <웃음소리>는 개인의 ‘환상적 경험’을 통해 자아와 세계의 조화 가능성, 더 나아가 주체성의 회복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웃음소리> 속 여성은 허무한 현실을 이유로 자살을 계획하지만, 삶에 대한 본연의 욕망이 자살에의 결심과 충돌한다. 그녀는 환상을 통해서 폐쇄적인 외부세계를 벗어나 내면적으로 현실을 재인식 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는 그녀로 하여금 허무감을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하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러한 과정, 부조리한 현실과 관조적 태도, 그리고 환상적 경험을 통한 현실의 재인식은 최인훈 작가가 생각하는 문학의 역할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최인훈 작가의 작품들을 통해,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으나 우리의 현실을 형성하고 있는 어떠한 외부세계의 일면을 본다. 이러한 환상적인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나’를 소외시키는 현실을 허구로 대체해서 상상 속에서나마 거꾸로 ‘나의 것’으로 만들게 한다. 현재에 끊임없이 조응하며 생동하는 것을 현대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최인훈의 작품은 역사적인 동시에 지극히 현대적인 작품이며, 격동의 근현대사가 한국에 남긴 부조리들을 적절히 해소해 나가는데 핵심적인 작용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고전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박시온(문과대 철학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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