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더 이상 강단에 서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후련하면서도 애틋한 마음입니다. 지금은 고향에 내려가 연로하신 아버지를 모시는 데 집중하고 있어요. 오랜만에 자유의 몸이 됐으니, 앞으로는 저술 활동과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일에 전념하고 싶습니다.” 심우경(생명대 환경생태공학부) 명예교수는 지난 1학기 개설된 ‘식물, 인간, 환경’ 강의를 마지막으로 강단을 완전히 떠났다. 식재학과 전통조경학의 권위자인 심우경 교수는 지난 7월 본교 인촌기념관에서 자신의 첫 단행본 <식물, 새 천년의 주인공>의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8월의 뜨거운 여름을 감춰뒀던 7월의 어느 날, 자연인으로서 삶의 다음 장을 준비하는 심우경 교수를 만났다.

스승과의 만남, 시골소년의 미래를 바꾸다

  “내가 입학하던 당시엔 고려대에 조경학과가 없었어요. 조경관련 과목이라곤 선택과목으로 개설됐던 조원(造園)학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심우경 교수는 자신이 조경학에 발을 들이게 된 계기가 운명과도 같았다고 회고했다. “1학년 때 원예학과 친목대회에서 만난 건국대 학생들과 어울리게 된 게 계기였죠. 그 친구들이 비닐하우스로 실습을 하던 ‘세검정’이란 곳에 매일 따라다녔는데, 그 곳에서 재야학자 ‘운정 한도’ 선생을 만나게 됐습니다.”

  국토의 개발과 활용에만 매달리던 당시 시대상황에서 한도 선생의 주장은 매우 혁신적이었다. “한도 선생은 자연과 더불어 자연을 취미로 하는 삶을 강조하셨어요. 10년 동안 매주 그 분을 찾아뵈며 전통정원, 자연철학 등의 다양한 지식을 배웠습니다.” 스승과의 만남은 시골내기 티가 남아있던 어린 학생의 미래에도 영향을 줬다. “줄곧 시골에서 자란 저는 농업발전에 기여하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분과의 만남은 저에게 새로운 학문의 길을 제시했고, 조경학자로서 인생이 시작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어요.” 대학 졸업 후 심우경 교수는 급격한 산업화로 파괴되는 국토를 복원하기 위해 설립된 ‘한국종합조경공사’에 공채로 입사하며 본격적인 조경인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 해외 나가서 얻었죠.”

  “제가 입사하고 얼마 안 돼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이 터졌습니다. 정부에서 황급히 육영수 여사 묘지조경을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죠.” 당시 신입사원이던 심우경 교수는 얼떨결에 국가적 중책사업에 참여하게 됐다. 영부인의 묘지가 완성되자, 이제 국립묘지 전체를 다시 설계하라는 주문이 내려졌다. “낡은 국립묘지 안에 부인의 묘만 화려하게 꾸며진 게 대통령의 마음에 걸렸던 모양입니다. 국립묘지 전체를 처음부터 손수 뜯어고쳤죠.” 일련의 국가사업들에 참여하며 능력을 인정받은 심 교수는 이후에도 국회의사당 조경설계, 국립공원집단시설 설계 등 굵직한 국가사업을 도맡았다. “수많은 국가적 사업에 참여할 수 있었던 건 조경인으로서 커다란 행운이었습니다. 그 때 얻은 값진 경험과 실무적 지식들은 책에선 배울 수 없는 것이니까요.”

  다량의 유전이 중동에서 발견되며 달아오른 1970년대 ‘중동 붐’ 또한 기회로 작용했다. 당시 정부는 기업들의 중동 진출을 강하게 추진했고, 한국종합조경공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직원 중에서 영어가 되는 사람을 뽑다보니, 내가 비서 겸 통역사로 선발돼 중동으로 가게 됐어요. 보름 비자를 받아 사우디의 행정수도인 ‘젯다(Jeddah)’로 가게 됐습니다.” 젯다에 도착하자, 일주일 안에 도시조경을 설계할 수 있겠냐는 갑작스러운 요구가 들어왔다. 촉박한 상황이었지만 며칠 밤을 새 설계안을 완성해 가져갔다. “알고 보니 우리 외에도 영국, 프랑스에서 온 세계 유수의 조경회사들에게 같은 일을 요구했더라고요. 5개국이 돌아가면서 브리핑을 했는데, 내 계획안이 최종적으로 선정됐어요.” 당시 심우경 교수가 설계 및 감리한 젯다시 인터체인지 조경은 한국 최초의 해외조경설계로 남았다. “국제적 조경회사들을 실력으로 이기고 나니, 국제무대에서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됐습니다. 그와 더불어 우리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무궁무진한 잠재력에 대한 확신도 갖게 됐어요.”

 

앞으로의 천년, 식물이 지구의 주인공 돼야

  최근 심우경 교수는 ‘지구환경보전’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수백 년에 걸친 무방비한 산업화로 병든 지구를 재생시킬 동인으로 그가 제시하는 것은 바로 ‘식물’이다. “식물은 지구를 살림과 동시에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높일 귀중한 존재입니다. 20년 전 ‘식물인간환경학회’를 창립해 이를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있어요.” 6월 출간한 저서 <식물, 새 천년의 주인공> 또한 해당 주제에 대한 심우경 교수의 식물 연구를 집대성한 것이다. “지난 천년은 기계가 지배한 시대였습니다. 기계는 인류에게 환경파괴와 인간성의 타락이라는 부작용을 안겼어요. 앞으로의 천년은 식물이 주인공이 돼 당면한 환경문제를 해결하고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뜻에서 제목을 붙였습니다.”

  심우경 교수는 급격한 서구화로 전통이 경시되는 현 세태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보탰다. “전통문화는 수천 년에 걸쳐 쌓아온 생활양식의 총체입니다. 한국인이 한국의 전통문화를 접하면 편하고 익숙한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죠.” 심우경 교수는 근래 젊은 세대가 정작 우리 것은 알지 못한 채 외국문물을 추구하는 현상을 안타깝게 여겼다. “식물로 비유하자면 전통문화는 뿌리와도 같습니다. 뿌리가 온전한 나무는 천 년도 넘게 자랄 수 있어요. 우리 인간도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 이외의 전통이라는 정신세계를 제대로 알아야 발전할 수 있습니다.”

 

세계로 뛰어드는 야심찬 고대인이 되길

  26년 간 본교 교수로 봉직해온 심우경 교수는 본교 발전을 위한 애정 어린 쓴소리를 건넸다. “민족대학으로서 고려대는 내외적으로 한국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은 민족대학과 거리가 멀어요.” 대부분이 목조 건물인 한국 전통건물 양식과 달리 본교는 석조 건물이란 점, 캠퍼스 조경도 한국식이 아닌 서양식이라는 점을 꼬집었다. “심지어 어떤 총장은 학교에 일본산 철쭉을 마구 심어놨습니다. 민족대학의 일원으로서 부끄러운 일이죠.” 심우경 교수는 민족학의 무한한 가치에 주목하며, 본교가 진정한 민족대학으로 거듭날 것을 촉구했다.

  본교 후배들을 위해서도 진심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학생들의 자기계발을 위한 방법으로 많은 독서를 할 것, 많은 곳을 여행할 것,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 만날 것을 강조했다. “특히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하며 인적 네트워크를 쌓을 것을 당부하고 싶습니다. 대학생활은 사람들과 직접 부딪히며 성장할 둘도 없는 기회니까요.” 마지막으로 심우경 교수는 학생들에게 세계를 목표로 하는 원대한 꿈을 가질 것을 당부했다. “우리 학생들은 충분히 세계 사회에서 통할만한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자신의 꿈을 대한민국 안에만 가두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세계를 향해 거침없이 뛰어드는 야망을 가진 고대인이 되세요.”

 

글| 박진웅 기자 quebec@

사진| 조은비 기자 juliett@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