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어제 아는 와이프 봤어요?” 목요일만 되면 회사 친구 영인이는 전날 밤에 방영한 드라마 얘기에 신이 난다. 요즈음 꽤나 있기 있는 드라마라고 하는데 주인공이 은행원이란다. 그런데 거기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너무나 현실과 닮아 있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단다. 명절에 신권을 안 바꿔준다며 화를 내는 손님, 절차는 생략하고 무조건 편의를 봐달라는 손님, 대기시간이 조금만 길어져도 화를 내는 손님. 현실에서는 어디 이 뿐이랴. 어느 직업이나 고충은 많겠지만 은행원이나 승무원처럼 불특정 다수의 사람을 대면해야 하는 직업은 특히나 웃픈 에피소드 부자일 것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에 입사한 첫 해에 나는 이민이 가고 싶었다. 어느 책 제목처럼 한국이 싫어서, 아니 좀 더 정확히는 한국인이 싫어서 나는 이민이 가고 싶었다. 은행원이 되기 전의 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는데, 은행원이 되고 나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조금 달랐다. 지점에 들어올 때부터 그들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 있었고 초보 은행원의 실수에 관용을 베풀어줄 사람은 없었다. 한 번은 전화로 대출이자 납부일 안내를 했는데 고객이 다짜고짜 욕을 하는 것이었다. 선배의 훈수 대로 ‘녹음해서 신고할 터이니 다시 말해보라’고 호기롭게 맞섰다가 오히려 더 심한 욕을 들었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우습다. 그럴 때마다 소심한 복수로 그들의 자녀가 꼭 은행원이 되기를 기도했던 적도 있었다.

  이런 저런 일로 상심한 내게 아버지께서는 자원 없는 나라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다 보니 그런 것이라고 위로하셨지만 치열한 경쟁이 불가피한 이 나라에서는 어디서 무얼 하든 저렇게 화로 가득 찬 사람들과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엄청난 회의감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그들도 우리의 가족이나 친구, 혹은 나와 똑같은 사람들이다. 내가 오늘 아침에 만난 편의점 알바생도, 방금 통화한 쇼핑몰 콜센터 직원도, 퇴근길에 만난 택시 기사님도 누군가에게는 아는 언니, 아는 오빠, 아는 아저씨일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이름 모를 사람들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일까? 직업이라는 굴레에 갇힌 약자라는 생각 때문일까? 그 직원들이 옆집에 사는 이웃이거나 친구의 딸 혹은 우리 가족이라도 그렇게 했을까? 늘 어딘가에 화풀이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 나는 참 밉다.

  이민의 꿈은 접었지만 입사 후부터 지금까지 나의 이상형은 어디서든 기꺼이 예의 바른 손님이 되어주는 사람이다. 칠 년 째 찾고 있지만 어째 아직도 감감 무소식이다. 어쩌면 이번 생에는 그를 만나지 못할 지도 모르겠다는 슬픈 예감이 든다.

 

<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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