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스트로비치는 말한다. 현대인들은 마치 안전벨트처럼 ‘감정벨트’를 차고 다닌다고. 감정의 맥도날드화, 기계 숭배의 확장으로 여겨지는 탈감정 사회, 작위적인 것들이 판치는 세상 속에서 예측할 수 없는 것은 없어야 하고, 그러므로 고장 따위가 나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감정벨트를 멘다. 감정적으로 소모되는 것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그러고 보니 우리는 ‘감정적으로 소모하고 싶지 않아서’ 라는 말을 자주 한다. 탈감정적 유형들의 무정함과 냉철함이 감정적으로 피곤해지고 싶지 않아서 그러한 것이라면, 그들이 감정적인 부분 ‘외의’ 측면에서 극도로 피곤함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예상해볼 수 있다. 탈감정주의나 기계화 등은 결국 지나치게 피곤해진 현대인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멘 감정벨트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집합의식, 집합적 흥분, 신성한 것의 범주 등 집합적 해결책을 제시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옭아맨 감정벨트를 풀 수 있도록 탈감정적 유형의 개인적, 심리적 안정을 되찾아주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또한 기계를 숭배하는 것이 반드시 인간성의 결여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인간은 어쨌든 굉장히 편리해지고 모든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기계화가 감정을 식민화했고, 사회적 상호작용이 순탄하고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려면 탈감정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극단적인 경향이 있다. 만일 내가 있는 곳이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알고 있더라도, 이 대로가 더 편하고 행복하고 벗어나고 싶지 않다면? 죽음에 대해 진정으로 슬퍼하지 않고, 내가 죽었을 때조차 사람들이 형식적인 눈물 후에 화장을 하고 장례를 마치는 간단한 작별인사가 선호될 수도 있다.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지배 받는다면 식민화가 맞지만, 의식한 상태에서 지배 받기를 선택했다면, 이미 그 순간부터 과연 그것을 지배 혹은 식민화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일까?

  메스트로비치는 우리가 탈감정사회에서 벗어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지만, 나는 아직 탈감정화가 진행되지 않은 부분이 누구에게나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만일 탈감정화에 대항하고 싶다면, 먼저 우리는 각자 모두 탈감정화의 개념에 대해 정확하게,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 속에서 아직 진정성이 살아 숨쉬고 있는 부분, 벨트 속에 갇히지 않고 열렬히 날뛰는 감정, 실제의 경험에 기초한 생생한 기억이 지배하는 부분을 찾아내고 확장해 가야만 한다. 아직 진정성은 죽지 않았다.

 

글│구수희(경영대 경영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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