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편지쓰기에 취미를 붙였던 적이 있다. 살면서 참 드물게 한가한 날들이었다. 길게 늘어진 무료함을 주워 담으려 꽉 채운 A4용지 다섯 바닥 정도의 편지들을 썼다. 편지를 다 쓴 날에는 오후 다섯 시쯤 딱 맞춰 우체국에 갔다. 보낸 걸 까먹을 만큼의 시간이 지나면 편지를 잘 받았다는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보통 일주일 하고 하루를 보탠 시간이 걸렸다. 손편지에 손편지로 답장을 받은 적은 거의 없다. 사실 애초에 답장을 받으려 보낸 것도 아니었다.

  편지를 쓴다는 건 좀 별종 취급받는 일이었다. 온갖 소셜 어쩌구와 메시지 어쩌구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손편지는 좀 웃긴 종류의 물건이긴 하다. 기가비트 랜이 발밑을 지나다니는 나라에서 일주일하고 하루를 걸려 5000자를 전달한다는 건 우습다. 하지만 편지는 편지다. 편지로만 온전히 전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시답잖은 이야기가 있어서 나는 밤을 새워 손으로 편지를 쓰고 부치곤 했다. 그러고는 편지를 보냈다고 우체통 앞에서 문자를 보냈다.

  요즘 세상에 편지를 보내는 취미를 가진 게 나 뿐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박선아 작가의 <어떤 이름에게>는 작가가 여행 중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아서 낸 책이다. 책 속에 대단한 이야기들이 실려 있지는 않다. 사실 당연하다. 요즘 세상에 대단한 이야기는 문자 메시지나 하다못해 전자우편으로 보내는 것이 맞다. 긴급한 일을 일주일 하고도 하루 뒤에 전하는 고약한 취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다만 이 책에는 그런 위급한 것들 대신 사소한 이야기들과 사소한 시선들이 담겨 있다. 사실 그런 것들이야말로 편지에 쓰기에 적당하다. 작은 이야기들은 자주 편지지와 받는이 없이는 증발되어 버리곤 한다.

  편지글의 특성상 글 내부에 받는 사람의 명확한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어느 정도의 추측은 가능하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우리는 어떤 이름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작가의 시선은 여전히 따뜻하게 지면 위를 맴돈다. 좋은 이야기를 엿보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시답잖은 이야기들이 어느 이름을 만나 온기를 얻었다. 온도는 한참 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일상에 대한 설렘을 문득 느꼈다. 하루의 이야기들을 가지고 뭔가 꾸려낼 수 있다는 것은 가슴 뛰는 일이다. 편지를 쓸 때 나는 지극히 보통의 일들에도 제법 풍부한 감상을 느끼곤 했다. 아마도 어떤 이름들의, 혹은 편지지의 힘이었겠지 싶다. 가끔은 무료하지 않아도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받는 사람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일상을 위해서도. 이건 제법 공정한 거래라고 생각한다. 못 해먹을 짓은 아니다. 장롱 속 필름 카메라도 다시 꺼내 쓰던데 우체통 정도는.

 

조현식 (문과대 국문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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