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그런 일’이 있으면 다 관두고 나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으응,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사실 그게 얼마나 쉽지 않은지 잘 안다. 상사와 등진 후 받게 될 혹시 모를 불이익이 두려웠고, 그 두려움은 당장의 싫은 감정과 뒤섞여 침묵이 됐다.

  요즘 학내에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혐의에 내려진 무죄선고를 규탄하는 자보들이 속속히 붙고 있다. 위력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행사되진 않았다’고 말하는 사법부도 가해자라는 이야기가 특히 눈에 띈다. 바로 그 사법부가 지난 12일 김문환 전 에티오피아 대사에게 같은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했다. 과연 사법부가 안 전 지사의 사건에서만 유독 소극적이었는지 생각해볼 지점이다.

  정확히는 ‘위력 행사가 없었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볼 만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판결이었다. 위력과 간음 간 인과관계를 확신할 수 없다는 이 판결이 안 전 지사의 ‘결백’을 인정하는 것이라 해석하면 곤란하다. 이번 판결 역시 ‘위력’이 그간 그녀를 얼마나 압도해왔을지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단 지적에서 벗어날 순 없지만, 확실히 드러난 사실을 의도적으로 배제할 수도 없다. 김 전 대사 사건에서와 달리 안 전 지사 사건 재판부는 김 씨가 제출한 증거기록 중 주요 부분이 삭제되어있다는 점이나 다른 증인의 진술과 차이가 있다는 점을 보고 신빙성을 재고해야할 책임도 있었다.

  저항하지 않은 것인지, 못한 것인지 이 한 끝 차이가 ‘위력 행사 인정 여부’를 가른다. 이에 대한 기준이 입법화되지 않은 지금까지 누군간 피해자가 되어왔다. 이제 판사의 자율에 맡길 것이 아니라 입법 과정을 통해 법적 근거 자체에 변화를 줘야 한다. 그때까지 ‘유죄’라는 속 시원한 답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지난 1월 이후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죄에 대한 개정안이 8건이나 발의됐으나 대부분 법정형을 상향하는 데 그쳤다. 법의 해석과 적용은 다시 사법부로 넘어왔으니 서로 책임을 미루며 제자리걸음 하는 꼴이다. 실질적인 논의가 절실히 필요한 때다. ‘가해자 편드는 사법부’라는 분노어린 외침만으론 지금까지의 그녀들, 그리고 앞으로의 그녀들의 곁을 끝까지 지켜줄 수 없다.

 

박규리 사회부장 e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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