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대표 소설 중 하나인 <크눌프>에서 헤세는 영웅의 일생을 기록하는 대신, 자유를 추구하며 살다가 홀로 길에서 죽음을 맞이한 크눌프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크눌프는 가족을 만들지 않고 평생을 방랑하며 정형화되지 않은 인생을 살았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에 의해 끊임없이 평가되고 그 속에서 고독을 느낀다. 그럼에도 그의 삶이 가치 있고 더욱 빛나는 것은, 삶의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우리에게 남기기 때문이다.

  사회는 성공적인 삶의 표준을 정해 두고 따르도록 강요한다. 생산성이 기준인 현대 자본주의 세계에서 ‘성공한 삶’을 위해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 혹은 자신의 욕망과 상관없이 ‘노력’해야 한다. 실패한다면 그것은 그 개인은 무능력하다거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간주된다.

  <크눌프>는 이와 같은 사회적 분위기에 제동을 건다. 헤세는 1954년 1월 에른스트 모르겐탈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크눌프와 같은 인물들은 나에겐 매우 매혹적이네. 그들은 ‘유용하지는’ 않지만 많은 유용한 사람들처럼 해를 끼치지는 않지. (중략) 오히려 나는 이렇게 생각하네. 크눌프와 같이 재능 있고 생명력 충만한 사람들이 우리의 세계 안에서 자리를 찾지 못한다면 이 세계는 크눌프와 마찬가지로 그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141쪽)

  헤세가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는 문제시되는 개개인이 아니라 사회구조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산업화와 맞물려 유례없는 풍족함을 달성했지만 생산성이라는 목표를 위해 개개인은 도구로 전락했다. 물질적 성공이 인생에서 달성해야 할 중요한 가치로 추앙받는 것, 이에 따라 표준화된 삶의 방식이 나타나는 것 또한 생산성 높은 인간이 되어야만 한다는 사회적 압박에 대한 결과이다. 크눌프와 같은 사람들이 소외되어 살아간다면 그것은 당사자의 잘못이나 실책이 아니라 이 사회 전체의 책임이다.

  우리 사회가 이처럼 인간의 욕망을 통제하고 도구화할수록, 크눌프가 느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고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해도 사회의 압박을 견디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는 것도 박수 받을 수 있을지언정 결코 당사자의 행복한 삶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끊임없이 자신의 방식을 재단당하는 크눌프가 정작 타인의 삶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바로 이 지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크눌프의 이러한 태도는 ‘삶의 방식’이 평가 가능한 것인지, 더 나아가 사회가 일정한 삶의 방식을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정당한지에 대한 성찰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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