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정말이지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들이 있다. 이제부터 <베놈>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벌써부터 고민이 깊어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좋은 영화는 아니다. 구성은 뒤죽박죽이고, 캐릭터는 일관성이 없으며, 개연성은 엉망진창이다. 대체 이 영화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영화는 현 세대에서 가장 주효한 창작물이다. 투입되는 인력은 당대 최고 수준의 전문적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고 들어가는 자본은 다른 예술 분야와는 비교가 되질 않는다. 저런 사람들이, 저만큼의 돈을 쏟아 부었는데 나온 작품이 겨우 저 정도라고?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될 때마다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결국 창작은 개인의 문제라는 점이다. 개인, 그러니까 누군가의 개성. 갖가지 사고가 겹쳐 작품이 난장판이 되어 간다 해도, 누군가는 반드시 자신이 믿는 바를 관철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러다 더 크게 망하는 경우도 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신중하게 지켜진 특유의 개성은 빛나는 조각으로 남는다. <베놈>의 불균형은 바로 여기에서 발생했다. 원작 만화 속의 베놈이 악당으로서 발휘했던 특유의 개성은 휘발되어 버렸으니 결말부의 무리한 전개가 나오는 거다.

  재밌는 것은 바로 이 휘발된 개성이야말로 영화 밖에서 <베놈>을 바라볼 때 가장 의미심장한 구석이라는 점이다. 작품 속에서 누군가의 개성이 사라지는 것은 대부분 다른 이의 관점이 과도하게 개입됐을 때다. 이때 개입되는 다른 이의 관점은 여러 종류다. 시장의 흐름, 대중의 욕구, 그리고 유행. 적어 놓고 보니 다 비슷한 말인 것 같지만, 어쨌든. <베놈>은 개성을 버린 대신 이러한 관점을 매우 충실하게 수용한다. 이를 테면 주인공인 ‘에디 브룩’의 직업 같은 것. 원작에서 <베놈>은 스파이더맨의 숙적으로 피터 파커가 사진을 찍어 파는 데일리 뷰글의 기자였다. 영화 속의 에디 역시 기자지만 요즘 시대에 맞게 유튜브를 중심으로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악당 역할의 칼튼 드레이크도 흥미롭다. 젊은 나이에 유전공학 분야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둔 칼튼 드레이크는 유인로켓사업에 골몰하고 있는 인물이다. 자연스레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페이팔의 창업자이자 테슬라 모터스의 창업자인 엘론 머스크다. 몇 년 전 엘론 머스크는 혁신적인 CEO로서 <아이언맨>의 주인공 토니 스타크의 모델로 알려졌다. 최근 몇 가지 구설로 인해 좋지 않은 평판이 돌고 있는 엘론 머스크의 대중에 대한 이미지가 일정 부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주의 깊게 봐야 하는 것은 영화에 등장하는 노숙자들의 존재다. 트럼프가 공공예산을 대대적으로 삭감한지 1년 정도가 흘렀고, 미국 대도시의 노숙자 대책은 힘을 잃어 버렸다. 독선적인 자본가가 제물로 삼는 수많은 빈곤층의 존재는 이러한 현실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

  개성을 잃고 유행을 따르는 작품은 분명 시시하다. 하지만 관점을 바꿔 본다면 그 속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사실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징후로 드러나는 현실의 맨얼굴 같은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결말부에 베놈과 에디의 얼굴이 절반씩 드러나는 장면 또한 눈여겨 볼만하다. 악당에게 맞서기 위해 우리는 종종 괴물이 된다. 무척, 서글픈 일이다.

 

이영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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