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이슬 내리는 날이다. 서느런 바람에 코끝이 시리고, 지근거리는 콧물을 닦아내느라 콧등이 얼얼하다. 사람들은 장롱에서 하나둘씩 코트를 꺼내 옷깃을 여미기 시작한다. 얼음 채운 커피보다 훈훈한 김 나는 차 한 잔이 당기는 계절. 을지로3가 역전 ‘을지다방’ 쌍화차에 담긴 추억이 찬기를 달래줄 테다.

  뭉근히 끓인 쌍화차에 가을 대추가 동동 떠 있다. 사장 윤현주(여·70) 여사는 손주에게 보약 달여주는 마음으로 10시간 동안 쌍화차를 끓인다. 계피 향이 물씬 나는 차는 데운 콜라처럼 달콤하고, 노른자위는 입술을 보드랍게 스쳐 들어와 입안에서 몰랑몰랑 터진다. 고소하게 씹히는 해바라기 씨와 잣은 먹는 즐거움을 더한다. 가만히 담긴 차에 가을 들판이 한 아름 안겨 있다.

  윤현주 여사는 사촌 언니 이복자(여·73) 여사와 갈보리떡을 사이에 두고 담소를 즐긴다. 손주 버릇을 흉보면서 세월 지난 얘기를 한참 한다. 이복자 여사는 대뜸 딸 사진을 꺼내 든다. “우리 딸이야. 나 닮아서 예쁘지?” 옆에서 윤현주 여사가 거든다. “우리 언니랑 조카가 이쁘긴 하지.” 다방은 호호 웃는 소리로 가득하다. 여사들은 “이렇게 웃고 살면 젊어지는 거야”라며 너스레를 떤다.

  윤현주 여사는 18년 전에 을지다방 사장이 됐다. “친구 대신해서 며칠 다방을 보다가, ‘네가 잘하니 아예 맡으면 어떻겠냐’고 해서 인수했지. 참 우연찮은 일이야.” 손님들도 윤현주 여사에게 반갑게 인사한다. 30년째 을지다방 단골이라는 김균재(남·91) 옹은 “다방 커피가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다고, 네거리에서 제일 가까우니까 오는 거지”라며 능청이다. 옆에서 윤현주 여사가 “말씀 잘 하세요”라고 타박 주며 웃는다.

  을지다방은 65년째 을지로 네거리를 지키고 있다. 다방 벽면에 허름하게 잡힌 주름에는 세세연년의 기억이 아로새겨진 것만 같다. “여기는 아무것도 바꾸지 말고. 이렇게 구닥다리로, 오래 하면 좋겠습니다!” 김균재 옹 얼굴에 함박꽃이 활짝 폈다. 서늘해진 아침 바람도 뜨끈한 차와 사람 좋은 웃음소리에 덮이는 이곳. 찬 이슬 내리는 날, 추억은 을지다방 문 앞에서 만나.

 

글·사진│김태훈 기자 foxtr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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