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은 윤리에서 탁월한 아름다움이 비롯된다 생각했다.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는 예술작품을 감상하면서 마음에 평온을 찾는다. 이처럼 예술의 기능 중 하나가 감정의 순화인데 비윤리적 예술작품을 바라볼 때 인간이 평온한 마음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사람들에게 예쁜 걸 보여주고 그들의 심신을 돌보고자 하는 예술인이라면 그의 작품은 윤리적 결함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예술이 행해지는 우리 사회가 언제나 편안하고 아름다운 것만 볼 수 있는 윤리적인 사회는 아니다. 사르트르는 예술의 또 다른 가능성을 사회 모순의 비판에서 찾았고 이를 바탕으로 예술가는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참여문학론을 주장했다. 이런 참여문학론을 목적으로 하는 예술가는 종종 예술가로서 윤리의 테두리를 벗어나기도 한다.

  하나의 사례로 최근에 있던 런던 소더비 경매장에서 거리의 예술가 뱅크시는 자신의 작품 “풍선과 소녀”가 낙찰되는 순간 스스로 작품을 파쇄하여 경매에 참여했던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다. 그의 행위 자체는 사기이고 경매에 참가자들에 대한 기만이었지만 알렉스 브랜식, 소더비 현대미술 책임자는 그의 행위를 퍼포먼스로 받아들였다. ‘현대 미술 시장의 거래 관행을 조롱하고 예술의 파괴와 자율의 속성을 보여준 기획이라 생각한다’ 브랜식의 말이다. 그의 말대로 예술은 종종 우리 사회에 새로운 규칙을 제시하며 창조적 파괴를 이룬다. 그런 예술에 윤리라는 테두리를 들이민다면 르네상스와 같은 역사적 사회발전이 앞으로 가능할까?

  다만, 예술에서 윤리라는 기준을 거두기 전에 그 영역을 명확히 나눠야 한다. 지켜야 할 선은 존재한다. 예술이라는 미명 아래 예술인의 행위가 모두 허용된다면 이는 오히려 예술계 전체에 해악이 될 것이다. 예술가의 행위를 그의 성품에서 비롯된 것과 예술가라는 직업 소명에서 비롯된 거 두 가지로 나눠보자. 이 중 예술가의 직업소명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윤리적 잣대를 거두고 예술로서 가치를 먼저 인정하고 이에 대해 토의해야 한다. 하지만, 그의 성품에 비롯된 악한 행위는 예술과 아무 상관없이 그의 개인적 도덕성에 결여된 것이다. 개인의 부도덕한 성품이 드러났을 때 그 지위를 내세우며 표현의 자유, 예술가의 자율성을 우기는 사람들은 예술계를 좀먹으며 예술의 본질을 훼손하는 치졸한 인간들일 뿐이다.

  이처럼 예술가와 윤리를 논할 때는 그의 비윤리적 행위가 형편없는 성품을 가리기 위한 구차한 변명인지 예술가 소명으로서 위악(僞惡)인지 하나하나 따져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최준형(미디어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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