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피용>,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인간만큼 역마살이 낀 존재가 어디에 있을까. 지금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미래를 사랑할 수 있게 될까. 우리가 별 사이의 나비가 되었을 때 날개를 쉬기 위해 앉았던 땅은, 풀잎은 어느 순간 우리의 손에 죽어가지 않을까. 아니면 우리 자신이 내부에서부터 썩어들어가지 않을까. 길고 긴 고통 끝에 어거지로 이어간 우리의 생명은 결국 우리가 탄생한 그 때로 돌아가 순진한 모습을 띤 채 고행길을 반복하지 않을까.

  별 사이의 나비가 되는 꿈을 꾸고 지구의 땅을 박차고 나간 이브 크라메르. 그가 도피했던 세상은 눈이 죽은 자들의 도시였다. 그러한 이기적인 인간에 대한 비현실적인 극단적인 묘사 속에서 우리는 은연중에 과연, 혹시, 설마,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웃으며 넘기기엔 마음 한 켠이 불편하다. 크라메르의 여행이 옳고 지구의 모든 사람은 틀렸을까? 내가 과연 저 곳에 있었다면 나는 크라메르와 14만 명의 나비였을까, 아니면 타들어가는 지구에 남겨진 갈대였을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저자가 그린 지옥도와 동떨어진 세상이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비현실 속에서 현실의 자극적인 부분을 과장함으로써 탈피하는 나비의 날개를 더욱 휘황찬란하게 보이도록 한 점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여기에 더해 갈등을 딛고 피어난 엘리자베트와 이브의 사랑 이야기 역시 날아가는 나비를 더 낭만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요소이다. 이때까지 유지되어온 자아가 타인에 의해 강제적 종말을 맞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엘리자베트는 이브를 증오했다. 그를 모욕하고, 죽이려 하고, 혐오했다. 그러나 엘리자베트는 이브를 사랑하게 된다. 그것은 여태까지 상업영화에서 많이 조명되어온 ‘로맨스’와는 거리가 먼 사랑이었다. 일반적인 사랑이라기보단 ‘꿈의 유대’였다. 이브와 엘리자베트가 사랑하게 된 것은 ‘사랑’의 고유 의미에서 훨씬 동떨어진, 앞으로 파피용을 이끌어갈 두 사람이 이루어낸 새로운 도약이 낳은 고양감에서 생겨난 복합적인 감정 때문이었다. 그들의 유대와 결합은 파피용호의 여행의 시작을 훨씬 안정적으로 다가오게 만들었다. 이브라는 존재의 불완전성은 엘리자베트라는 존재의 강인함에 의해 크게 보완되었다.

  인간의 인생이라는 여행은 항상 땅에서 시작하고, 땅에서 끝난다. 엘리자베트나 이브와 같은 미미한 존재들의 대단한 일조차 개미같이 많은 인간의 파도는 결국 일을 처음으로 돌려버린다. 기존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파피용호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존 세계의 재력가 맥 나마라의 도움이 필요했고, 새 시대를 향해 떠나는덴 성공했지만 돌아온 곳은 새 세계가 아니었다. 언제나 떠나고, 정착하고, 떠나기를 반복하는 인간은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같은 길을 왔다갔다하고만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대서사시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역설적인 결과들을 조명하면서 여행하는 인간의 끝을 보여준다. 인간의 인간성을 벗어나려는 노력은 결국 그 자신으로 회귀함으로 마무리된다. 여행의 끝에서 우리는 못 가본 지평선 너머에서 살아가는 또 다른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글 | 유민우(경영대 경영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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