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진주해온, 어쩌면 태초부터 주둔해온 적군으로의 둘러싸임은 모태인걸까, 회귀인걸까, 아니면 둘 다를 긍정해버리는 모태로의 본래적 회귀인걸까.”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정의 아래 은연 중 속박당하는 개인을 무진의 수천 수백만 물 알갱이 군집이 차갑게 보듬으며 몽롱한 환희의 나락으로 이끌 때, 개인은 무언가에 홀린 듯, 마치 태초의 자기 발원 공간으로 회귀하듯 마성의 초대에 끌린다. 초대에 대한 답은 개인의 선택에 달린 것이지만, 존재의 사원 저 어딘가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리는 ‘마성의 초대’는 개인이 부정하기에는 너무나 큰 불가항력을 띤다. 개인의 최초 지구 도래 순간부터 함께 자리해온, 심약지수에 경종이 울릴 때마다 울림 크기를 조절해온, ‘무언가’라는 것이다.

  소설 속 윤희중은 경종이 울릴 때마다 정직하게 배후에 존재하는 항력을 못 견디는 듯 초대에 선뜻 응해버린다. 성급히 ‘예’ 해버린 대답에 대해 초조해하는 치졸함 또한 잊지 않는다. 소설 무진기행은 옭죄이는 듯한 삶으로부터 도피하여 무진으로 온 윤희중의 모습을 그려낸다. 이러한 옹졸함과 도피에 대한 응낙은 비단 윤희중만의 문제인 것일까. 윤희중은 스스로에 대한 은닉과 탈바꿈의 시도의 공간으로 무진을 택했다. ‘택했다’는 표현보다는 본능적인 회귀 본능을 ‘따랐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여하간 판도라의 상자 속 가장 밑에 숨겨져 있는 자아에 대한 탐색은 윤희중 본인이 아닌 개개인 모두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지구상 인류의 도래 이후 수천 년의 시간이 흘렀고, 지나간 시간의 양에 필적할 만큼의 복잡성이 사회 시스템 내에 자리했다. 사회는 개인의 군집의 소산이라지만 역설적으로 개인은 이러한 구조에서 온몸을 뒤틀었다. 아이러니컬한 고통 속에서 출구를 염원하고, 사회 속에서 개인의 존재 가치를 충분히 발현시키기 위해서 모두는 그 출구를 찾아내고야 만다. 개개인은 자신의 은밀한 상상이 가미된 은신처에서 자아를 은닉하고, 그 위에 새로운 색을 덧입혀 다시 사회로 복귀한다. 무진은 윤희중에게 있어 이러한 은닉처였고, 은신처였으며, 새로운 모습을 자각하게 하는 공간인 것이다. 원시 본연에서부터 올라오는 마성의 외침으로 인한 모태로의 회귀본능은 사회 속에 존재하는 모든 개개인 속에 고이 내재되어 있으며 단지 모습을 드러내는 발현 공간과 내용만 상이할 뿐이다.

  ‘한번만, 마지막 한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번만이다. 꼭 한번만.’ 윤희중은 자신에게 무력한 약속을 내건다. 개인의 은밀한 모태,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있는 이 모태와 은닉은 강한 회귀성을 띤다. 윤희중은 무진을 다시 찾게 될 것이다. 그것이 사업의 실패든, 사랑의 도피든, 지쳐 무기력해진 헌 자아를 재정비 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무진이기 때문이다.

 

김다영(미디어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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