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이들을 만나면 자주 묻는다. 나중에 커서 어떤 어른이 되고 싶냐고. 사실 이 질문은 우리도 어린 시절에 자주 들었던 질문이다. 그런데 일정 연령이 지나고 난 후에는 누구도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정한 연령을 지난 사람은 어른이 되고, 그렇게 어른이 되면 어른이 된 상태는 그냥 유지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리고 이 생각은 ‘어른’이라는 단어의 뜻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른’을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면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즉, 어른이란 성장이 완료되어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처럼 어른은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절대적인 개념을 지닌 단어다. 그래서 일단 어른이 되고 난 후에는 어른이 된 사람들끼리 누가 더 어른이고 누가 덜 어른이라는 비교는 가능하지 않다. 어른이면 모두 똑같은 어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른’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문맥을 잘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누가 누구보다 더 어른이라고 비교하여 말하는 일이 우리에게는 크게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일정 연령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모두 어른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우리는 가끔 ‘누가 더 어른이야?’라고 묻기도 하고, 또 어른인 A와 B에 대해 ‘A가 B보다 어른이다’라는 표현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은 우리가 어른을 상대적인 개념으로도 이해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한국어에서 ‘어른’은 절대적인 개념으로도 사용되고 상대적인 개념으로도 사용된다는 점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사실, 어른을 상대적인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은 한국어가 가지고 있는 특징과 관련이 있다. 바로 한국어에 발달되어 있는 높임법 덕분이다.

  한국어는 높임법이 발달한 언어다. 높임법에 따라서 존댓말과 반말을 사용하는 것이 한국어의 특징이다. 어른과 아이가 말을 한다면 어른됨을 비교하여 어른은 반말을, 아이는 존댓말을 사용한다. 어른과 어른이 만나서 말을 한다면 두 어른의 어른됨을 비교해서 더 어른인 사람이 반말을, 덜 어른인 사람이 존댓말을 사용한다.

  이처럼 한국어 높임말의 작동 원리는 서로의 어른됨을 비교하여 그 결과를 언어에 반영하는 것이다. 이때 어른됨의 비교 기준 중 중요한 것이 바로 ‘나이’다. 이는 한국어 사용자들이 나이와 어른됨이 정비례 관계에 있다고 믿고, 또 그럴 거라고 기대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한국어 높임법이 세대간 소통을 어렵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한국어 높임법을 하루아침에 없앨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여기서 잘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과연 높임법이 문제인지 높임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문제인지 말이다. 만약 한국어의 높임법이 서로간의 어른됨을 따져서 상대적으로 더 어른인 사람은 반말을, 상대적으로 덜 어른인 사람은 존댓말을 쓴다는 사실을 우리가 정확하게 인식한다면 높임말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달라질 것이다.

  또 만약에 한국어 높임법이,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의 어른됨의 정도를 서로 확인하게 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이해한다면, 한국어에 높임법이 있다는 것이 세대간 소통을 가로막는 것으로는 기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존댓말을 듣는 사람이 존댓말을 들으면서, 내가 상대보다 더 어른이므로 더 어른답게 상대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생각한다면 반말을 듣는 사람들이 존댓말을 듣는 사람들과의 소통을 특별히 부담스러워할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는 높임말 그자체가 아니라 반말을 쓰는 사람, 즉 존댓말을 듣는 사람이 어른인가 꼰댄가에 있었던 것임을 깨닫게 된다. 한국어의 높임법은 결코 아랫사람의 아랫사람되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른의 어른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신지영 문과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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