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25 13:14 (화)
“글쓰기는 내 존재를 증명하는 삶의 양식”
“글쓰기는 내 존재를 증명하는 삶의 양식”
  • 이준성 기자
  • 승인 2019.01.28 12: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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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사범대 국어교육과) 명예교수 인터뷰
신설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오탁번 명예교수는 "문학적 영혼은 시적인 것과 소설적인 것이 넘나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신설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오탁번 명예교수는 "문학적 영혼은 시적인 것과 소설적인 것이 넘나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교수, 시인, 소설가, 기자, 동화작가. 지나온 세월의 두께와 그 깊이를 증명하듯 오탁번(사범대 국어교육과) 명예교수는 참 많은 이름으로 불려 왔다. 정년 은퇴한지 벌써 10년이 더 됐지만 강단에 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가 가장 좋았다는 교수 오탁번, 등단한 지 50년이 넘은 노작가지만 60여 편의 소설을 엮어 출간한 마음만은 신인인 작가 오탁번, 그리고 누구보다 꾸밈없고 솔직한 인간 오탁번을 신설동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만났다.

 

  고려대를 사랑한, 고려대가 사랑한

  오탁번 교수는 대학 시절을 회상하며 연신 미소 지었다. 1964년 본교 영문과에 입학한 그는, 이듬해 고대신문에 입사해 3년을 몸담았다. “원고지에다 기사를 쓰면 바로 활자가 되는 게 참 신기하더라고. 그래서 열심히 기자 생활을 하다 보니 내성적인 성격도 많이 바뀌고 술도 잘 먹게 됐어.”

  편집국장을 맡고 있던 4학년 때 그는 고대생의 애창곡 <응원의 노래>를 작사했다. “한동안 중단됐던 고연전이 1965년에 재개됐는데, 당시 노래가 별로 없다 보니 학교에서 응원가 공모를 했지. 근데 학생처장이 응모작이 마음에 안 든다고 내게 작사를 부탁했어.” <응원의 노래>는 이후 고연전 때뿐만 아니라 7·80년대 시위가로도 많이 불리며 고대생의 애창곡으로 자리 잡았다.

  1978년 본교 사범대 국어교육과 교수로의 소임을 시작한 그는 학생들 사이에서 유명한 교수였다. “대한민국에서 내가 개강을 제일 늦게 하고 종강을 제일 일찍 하는 교수였어. 내 강의 50분 듣는 것보다 학생들 개개인의 삶을 충실히 사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지.”

  오탁번 교수는 독특한 시험 문제를 내기로도 유명했다. 기말고사 시험으로 학교에 자목련 나무는 몇 그루인가를 묻는 문제가 있었을 정도다. “학생들이 캠퍼스를 돌아다니면서 꽃 내음도 맡고, 벤치에 앉아 연애편지도 써봤으면 좋겠어서 그랬지.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여오라는 방학 숙제를 내준 적도 있어.” 그는 학생들이 하나의 과목이 아닌, 인생을 배우길 바라는 선생님이었다.

 

  시와 소설은 넘나드는 문학 혼

  오탁번 교수는 신춘문예 3관왕이라는 화려한 등단 이력을 갖고 있다. 1966년 동화 <철이와 아버지>, 1967년 시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 1969년 소설 <처형의 땅>으로 3차례 각각 다른 부문에서 당선됐다. “어려서부터 글을 쭉 써왔어. 문학 작품을 많이 읽었고 또 그걸 써 버릇했지.” 오 교수는 어릴 적 쓴 당신의 글을 받을 사람 없는 연애편지에 비유했다. “가난하고 외로우니까, 보여줄 사람은 없지만 계속해서 글을 쓴 거야. 사춘기를 겪는 나름의 과정이었던 거지.”

  등단 후 다채로운 형식의 글쓰기를 해온 그에게 시와 소설은 서로 다른 분야가 아니었다. “시랑 소설은 원래 하나야.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상호보완 하는 사이라고 봐야지.” 좋은 소설에는 서정적인 요소가 많고, 좋은 시는 그 서사 구조가 튼튼하다는 의미다. “백석의 시도 서사 지향적이고, 춘향전은 소설이라지만 시적인 요소가 아주 많아.”

  시와 소설에 대한 신념을 자신 있게 밝히는 그에게서 시인, 소설가가 아닌 문학인으로서 자부심이 엿보였다. “사람의 피가 동맥과 정맥을 통해 흐르는 것처럼, 문학적 영혼은 시적인 것과 소설적인 것이 넘나들어야 해. 내가 그 증거지 뭐겠어.”

 

  노을은 황혼에 가장 뜨겁게 불타오른다

  등단한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창작에 대한 오탁번 교수의 열정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다음 달 10번째 시집 출간이 계획돼 있으며, 계속해서 창작 활동을 이어갈 예정이다. “시가 됐건 소설이 됐건,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계속 글을 쓸 거야. 좋은 작품을 남긴 작가로 기억되고 싶어.”

  오탁번 교수는 문득 신춘문예 3관왕을 했던 20대 시절의 글쓰기와 77살 노작가의 글쓰기를 비교했다. “어릴 때는 모든 게 다 처음 보는 거라 궁금한 게 많았다면, 지금은 여러 가지를 보고 배운 만큼 보이지 않던 게 비로소 보이더라고. 예전처럼 신선하고 풍부하진 않을지 몰라도, 깊이가 생겼으니 좀 더 진짜가 나오겠지.” 앞으로 나올 그의 작품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하지만 글을 쓰며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작가에게도 창작은 여전히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글을 쓰는 건 참혹한 노동이야. 시베리아 유배지에서 수형 생활을 하는 느낌이지.” 그런 고통에도 불구하고 계속 글을 쓰는 이유는 간단했다. “글을 쓰며 얻는 보람이 내 존재를 증명하는 삶의 양식인 걸. 좀 힘들다고 사람들이 존재의 양식을 포기하지는 않잖아.”

  오 교수는 마지막으로 조국을 버리고 출가하라고 후배들에게 조언했다. 한국에서만 살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상을 살고, 성인이 된 후엔 부모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으라는 이유에서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니까 열심히 살라고. 자기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거야.”

 

글 | 이준성 기자 mamba@

사진 | 고대신문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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