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의 약속

문태준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별이 보고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검당 볕 내리는 고운 마루가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

어느 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하였다

겨울 방이 방 한 켠에 묵은 메주를 매달아 두듯 마음에 봄가을 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

 

그러나 하릴없이 전나무 숲이 들어와 머무르는 때가 나에게는 행복하였다

수십 년 혹은 백 년 전부터 살아온 나무들, 천둥처럼 하늘로 솟아오른 나무들

뭉긋이 앉은 그 나무들의 울울창창한 고요를 나는 미륵들의 미소라 불렀다

한 걸음의 말도 내놓지 않고 오롯하게 큰 침묵인 그 미륵들이 잔혹한 말들의 세월을 견디게 하였다

그러나 전나무 숲이 들어앉았다 나가면 그뿐, 마음은 늘 빈집이어서

마음 안의 그 둥그런 고요가 다른 것으로 메워졌다

대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듯 마음이란 그런 풍경을 들어앉히는 착한 사진사 같은 것

그것이 빈집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자소서, 면접, 취업, 공모전, 그리고 졸업. 이제 4학년이면 화석들 사이에도 못 낀다며 친구들과 주고받던 농담이 진담으로 바뀌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순간을 지나 나는 2019년의 미세먼지 가득한 서울의 겨울 한복판으로 던져졌다. 틈만 나면 자체휴강을 일삼고 시험 기간이면 몇 장 안 되는 ppt를 보는 둥 마는 둥 뒤적이다가 시험장으로 향해도 자신만만하던 그때가 나에게도 행복하였다. 본관 잔디밭에 누워 혼자 시집을 읽거나 뜻을 알 수 없는 철학서를 뒤적이면서 이를 인문학도의 기쁨이라 포장했던 그 오만하고 방자한 시절이 나에게는 전나무 숲이었다. 

  그 숲엔 어렵고 난해한 책들이 나무처럼 자리하고 있었으나, 나는 그 나무들 사이에 빛처럼 자리 잡은 고요를 사랑했다. 그러나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숲이었던 그곳은 시멘트가 덕지덕지 발린 빌딩들로 가득 차 있었다. 둥그런 고요 속으로 소음이 파고들었고, 중국발 미세먼지가 잔뜩 스민 진눈깨비가 함께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이 빌딩 숲도 잠시 머물다 나가면 그뿐, 내 마음은 다시금 고요로 가득 찰 것이라 꿈꿔보지만, 방학에도 그치지 않는 퇴근길 인파 속에서 밀리고 채이며 나는 몽유병자처럼 구직의 길을 걸었다. 들어앉히지 않아도 비집고 들어오는 도시 풍경의 무례함 때문에 내 마음속 사진사는 어쩐지 조금 지친 것 같다.

 

박찬희(문과대 국문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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