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엄마를 생각하면 잠든 내 머리맡, 고물 데스크톱의 자판을 두들기곤 하던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새벽잠 대신 한 사발 가까이 내린 뜨겁고 진한 커피를 선택하던 엄마는 글솜씨가 좋았다. 집안에 상장과 상패가 쌓여 갈 때면 어린 내 어깨는 으쓱해지곤 했다. 신춘문예에 당선된 지 얼마 안 된 그녀의 전화를 우연히 듣게 되기 전까진 그랬다. 엄마는 왜 등단하지 않았냐고 묻는 수화기 저편의 말에 멋쩍게 웃었다. “등단하면 돈 받고 이런 글 못쓴다하대. 그럼 안 된다 아이가. 막 작가슨생님이 아이고, 진짜 등단 안 하실랍니까. 이게 아무한테나 오는 기회가 아닌데예...하니까 내도 좀 혹했다 아이가. 하하...” 엄마는 어려운 집안 형편에 보태기 위해 글을 팔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게 억울하다는 투정을 달고 살던 내가, 엄마의 삶에 대해 부채 의식을 갖게 된 것은. 우리의 관계가 조금 더 무거워진 것은.

  통계청이 우리나라의 작년 합계출산율을 0.98명으로 발표했다. 여성 1명이 평생 낳으리라고 추산되는 아이 수가 한명도 안 된다는 얘기다. ‘합계출산율 0명대’는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일이라고 한다. 충격적인 출산율 통계를 미디어는 ‘유례없는 저출산, 이대로 괜찮은가’와 같은 제목으로 호들갑스럽게 다루고 있다. 반문하고 싶다. “부모와 자식 간의 무게를 책임져 줄 수는 있느냐”고. 입시지옥과 청년취업난이 중첩하는 지금의 대한민국이 아이 낳기 좋은 나라라는 데 선뜻 동의할 사람이 있을까? 내가 살고 싶지 않은 세상에 아이를 낳고 싶어 할 사람은 없다. 출산이란 건 유전자를 후세에 남기려는 동물적 본능이면서도 아이가 행복하게 살 것이라는 확신이 설 때 감행하는 일이 돼버렸다. 그렇기에 삶의 터전의 대물림은 신중할 수밖에 없다. 누가 이러한 선택을 비난할 수 있으랴. 저출산 문제의 대책으로는 흔히 출산장려금·아동양육수당 등의 금전적 정책 논의가 이어진다. 그러나 일차원적인 해결책에만 초점을 맞춰서 얼마나 나아질까. 살고 싶고 살기 좋은 나라로 얼마나 나아가는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다솜 기자 romeo@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