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먼지로 하늘이 뿌연 날이 많기는 하지만 봄은 봄이다. 서관 서쪽 출입구의 철모르는 스팀목련은 벌써 살짝 하얀 꽃망울을 물고 있다. 민주광장으로 내려가는 왼쪽 강당 언덕에는 명자나무가 붉은 기운을 품고 있고, 흡연자들의 명소인 서관 동쪽의 벤치 근처에는 튤립나무가 플라타너스나무인 척 잔가지를 내미는 중이다. 지난해 11월 말까지 붉게 피어 있었던 서관 발치의 장미나무는 이제는 검은 흔적만 남기고 있다. 아름다운 고려대 안암동 캠퍼스에도 많은 생명체들이 계절에 따라 명멸한다.

  1999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양철북>의 작가 귄터 그라스는 문학을 하는 이유에 대해 묻는 한 인터뷰에서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 잊혀가는 것, 습관의 덫에 빠지는 것들을 미학적 수단을 가지고 새롭게 명명하여 살리기 위함이라고 말한 바 있다. 시인이 무상한 사물들을 명명하며 시를 쓰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가 이름 없는 길에 이름을 붙여주는 것도 그렇다. 가장 인간적이며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위는 사물에 이름을 붙여주는 일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장소’, ‘즐거운 곳을 라틴어로 로쿠스 아모에누스라고 한다. 서양문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개념이다. 보통은 숲이 우거지고 나무그늘이 있는 전원적인 장소를 뜻한다. 많은 시인들의 작품에서 이런 곳을 접할 수 있지만 내게도 이런 장소가 우리 학교 교내에 있다. 바로 본관 뒤의 다람쥐길이다. 연구실이 구법학관에 있다 보니 자연스레 본관 뒤의 다람쥐길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게 된다. 1970년대에만 해도 이 오솔길에서 작은 다람쥐들을 마주치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학생들과 다람쥐들이 같이 쓰던 아주 작은 길이었다. 그래서 생겨난 이름이 다람쥐길이다. 지금은 이름만 다람쥐길이다. 학생들이 낮 동안 이용하고 난 뒤 그 길의 실제 주인은 고양이들이다. 다람쥐 대신 고양이가 들어선 폭이다. 하지만 그 길은 영원히 다람쥐길이다. 그것을 기념하여 지금은 다람쥐길초입의 벤치 위에는 실제의 다람쥐들 대신 조그만 다람쥐 형상이 하나 놓여 있다. 이렇게 무명의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밀려나는 것들, 세월이 밀어내는 것들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과 같다.

  이 다람쥐길에 들어서면 마음이 푸근해지면서 이런저런 추억이 떠돈다. 특히 여름비가 온 뒤 비안개가 낀 다람쥐길은 그야말로 로쿠스 아모에누스이다. 우산을 쓰지 않아도 비를 거의 맞지 않을 만큼 머리 위로 나뭇잎들이 지붕을 이루어 포근함을 만들어준다. 풍겨오는 풀잎향기와 비 냄새가 좋다. 그곳에서 다람쥐길의 신화는 완성된다. ‘다람쥐길은 마음속 시적 변용이 일어나는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바쁜 일상으로부터 잠시 휴가를 즐길 수 있다. 때로는 로부터 떠나는 여행을 할 수도 있다. ‘다람쥐길이라는 발음에서 형성되는 아늑함인지도 모른다.

  사물은 자신과 개별적 관계를 가질 때 비로소 존재한다. 낯선 여행지를 가도 남들이 미리 정해놓은 대로 가면 가지 않은 것과 같다. 사람들이 미리 만들어놓은 여행책자를 무조건 따라가는 여행은 의미가 없다. 극단적으로 말해 여행지에서 길을 잃어보면 그곳을 정말 각별히 알게 된다. 사물과의 소통이 가장 중요하다. 다른 말로 교감(交感)이다. ‘다람쥐길과의 교감은 그 길을 직접 걸으며 거기서 느껴지는 것들을 언어의 상징으로 바꾸어 볼 때 진정하게 이루어진다. “다람쥐길이라고 말할 때 다람쥐길은 우리의 마음속에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새내기들은 아직 낯설겠지만 학교의 모든 것들과 개별적으로 친근한 관계를 갖는 게 좋다. ‘안암의 언덕마음의 고향으로 만들어 속에 간직할 때 거기서 창조적 에너지가 생길 것이다. 고려대 캠퍼스 전체를 로쿠스 아모에누스로 삼자. 철학자이자 교육사상가인 오토 프리드리히 볼노의 말대로 공간이 사람을 만든다.

 

김재혁 문과대 교수 · 독어독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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