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

  조치훈 9단의 명언이자 드라마 <미생>의 대사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반복적인 업무와 치열한 신경전은 바둑판을 사이에 둔 바둑기사들의 치열한 수 싸움으로 비유된다. 그들에게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바둑 한 판, 한 판이다. 인생을 담고 있는 바둑을 학문의 영역으로 확장시켜 연구하고 있는 학자가 있다. 프로 9단 바둑기사이자, ‘바둑학의 창시자정수현(명지대 바둑학과) 교수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바둑학과인 명지대 바둑학과에서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정수현 교수를 만나 바둑, 그리고 바둑학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정수현 교수는 "바둑도 인생처럼 경쟁과 타협이 담겨있다"며 바둑의 의미와 가치를 설명했다.
정수현 교수는 "바둑도 인생처럼 경쟁과 타협이 담겨있다"며 바둑의 의미와 가치를 설명했다.

 

  - 바둑학은 어떤 학문인가요

  “사람들은 바둑이라고 하면 흔히들 바둑돌을 이용한 게임만을 떠올리죠. 하지만 바둑학은 이런 게임으로서의 바둑뿐 아니라 바둑을 즐기는 사람과 그들이 활동하는 사회까지 총체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바둑을 두는 기술, 바둑문화, 바둑실무, 바둑 마케팅 등을 연구하기도 합니다.

  바둑이 여가 활동으로서의 역할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둑은 지적능력과 인성 발달에도 효과적이어서 어린이들이 교육의 일부로서 배우기도 합니다. 성인들도 바둑에서 경영과 인생의 지혜를 배우죠. 또 매스컴에서는 바둑용어를 사회현상을 묘사하는 시사용어로 사용하고 있고, 바둑에 관한 글들은 바둑문학이라 불립니다. 결론적으로, 바둑학은 단순히 바둑을 즐기는 것 외에도 바둑으로부터 파생되는 다양한 현상들을 연구하는 학문인거죠.”

 

  - 국내 최초로 설립된 명지대 바둑학과의 설립 주역이십니다. 프로 기사에서 바둑학 교수로 나서게 된 계기를 여쭙고 싶습니다 

  “당시 한국이 바둑 최강국이었던 일본을 누르면서 전 사회적으로 바둑 이 일어났습니다. 전국에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바둑 학원이 1000곳 이상 생겼고, 바둑 관련 산업도 활황을 맞게 됐죠. 그러다 보니 대학에서도 바둑을 학문으로 공부하는 바둑학과가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자연스레 나오게 됐어요. 당시 명지대 총장이셨던 고건 전 총리가 학교에 바둑학과를 만들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셨고, 긍정적 반응이 많아 학과가 설립됐습니다.

  저는 바둑학과가 생기기 전부터 바둑학 교수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어요. 바둑 관련 책도 많이 집필하고, 바둑을 이론적으로 정립하는 일을 했기 때문이죠. 제가 바둑학과 설립에 참여하게 된 데는 바둑학 교수라는 별명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거라고 봅니다. 하하. 요즘도 별명 때문에 진짜 교수가 된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 바둑기술을 이루는 이론으론 무엇이 있나요

  “바둑 기술에는 전통적으로 사례 중심적방법이 있고, 최근에는 문제 해결적방법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바둑 연구는 사례 중심적으로 이뤄졌습니다. 수많은 사례를 통해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수를 둘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나하나 배우고 외우는 방식이죠. 이 연구 방식은 모든 수를 생생하게 볼 수 있는 방식이긴 하나, 프로선수가 아닌 일반인들에겐 힘든 방법이이에요. 일반인들이 모든 수를 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래서 사례마다 둔 수의 이유를 압축적으로 설명하는 공통적인 원리나 이론적 틀을 찾아내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또 하나는 문제해결적 접근법입니다. 전통적 접근법인 사례 중심적 접근법과 달리 어떤 수를 놓기 위해 현재 상황을 분석하고, 목표를 세우고, 대안을 찾고, 예측을 통해 판단하는 문제해결 방법에 초점을 둔 것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접근법을 쓰는 것이 바둑기술을 가르치고 배우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 바둑은 교육적으로도 도움이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바둑은 교육적인 측면에서도 이점이 많습니다. 특히 어린이들은 바둑을 통한 집중력 향상을 위해 바둑을 배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의가 산만한 아이들도 바둑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하면, 바둑판에 몰입하면서 집중력이 생기기 때문이죠. 또한, 바둑을 통해 문제 해결력과, 과제 집중력을 기를 수 있다는 점도 연구를 통해 검증된 사실입니다.

  바둑은 인성 발달적 요소가 많습니다. 바둑은 기본적으로 싸움이다 보니 상대를 불리하게 만드는 수를 놓아야 해요. 하지만 동시에 욕심을 절제해야 하죠. 살아가면서 욕심을 부리면 화를 입는 것처럼, 바둑도 마찬가지기 때문이에요. 바둑계에서 버림의 미학이라는 말이 쓰이는 것도 이 이유에서죠.”

 

  - 바둑은 그 속에서 인문학적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반상 위의 예술이라고도 불립니다

  “세사기일국(世事棋一局). ‘세상사는 한판의 바둑을 두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바둑은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들의 인생살이와 많이 닮아있어요. 영토전쟁 게임인 바둑과 인생이 닮았다는 것은 결국 인생도 치열한 생존 경쟁이라는 것이겠죠. 우리는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들을 바둑을 통해 체험하게 됩니다. 인간이 경쟁하면서 한편으로 협력하는 것처럼, 바둑에서도 경쟁과 타협이 담겨있습니다.

  반대로 바둑에서의 사고방식이 인생에 영향을 주기도 하죠. 사람마다 바둑관, 즉 바둑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릅니다. 이창호 9단은 바둑을 영토를 효과적으로 차지하는 경제전으로 보았고, 이세돌 9단은 바둑을 돌들의 전투로 보았죠. ‘부분이 아닌 전체를 봐라’, ‘3자의 시각을 가져라등 바둑에서의 시각이나 마음가짐이 인간수양, 더 나아가 인문학과 연결됩니다.

 

  - 알파고와 이세돌 9단과의 대결은 바둑의 영역에서는 기계가 인간에게 도달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바뀌는 계기가 됐습니다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이겨 인류사회에 충격을 줬습니다. 이는 4차산업혁명의 도래를 알린 것이라고 볼 수 있죠. 현시점의 바둑계는 수를 분석할 때 고수라 불리는 사람들이 그 수의 의미를 설명하고 마지막에 인공지능의 분석도 덧붙입니다. 인공지능의 검증을 받는 거죠. 바둑은 4차산업혁명의 매를 일찍 맞았지만, 이것이 비단 바둑계의 문제만은 아닐 겁니다. 머지않아 의료계에서도 의사가 자신의 진단을 인공지능에게 되물어보는 현상이 일어나겠죠. 기계가 인간을 이기는 건 당연하다고 봅니다. 기계는 어마어마한 데이터 처리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 뇌의 용량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죠.

  문제는 중국이나 일본은 바둑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 개발이 더디다는 겁니다. 미래를 보지 않고, 당장 돈이 되지 않는다는 근시안적 시각이 아쉽습니다.”

 

  - 바둑학, 그리고 한국 바둑이 더 성장하기 위해선 어떤 점이 필요합니까

  “한국 바둑엔 과학적 접근이 이뤄질 필요가 있습니다. 심리 트레이닝과 같이 바둑기술 외적인 부분에서의 접근도 확대해야 합니다. 또한 기존의 트레이닝 방식을 넘어서 데이터 기반의 접근법, 문제해결적 접근법과 같이 발전된 이론을 접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둑학은 우리나라에서 개발해 체계를 세운 학문입니다. 하지만 현재 바둑에 있어 가장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국가는 중국이죠. 한국이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바둑학을 활성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바둑학과가 설치된 대학은 명지대가 유일합니다. 바둑학의 학문적 주도권이 중국으로 옮겨가지 않도록 더 많은 대학에서 바둑학을 연구해야 합니다. 바둑학의 선두주자인 만큼, 주도권을 가지고 성장해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 전남혁 기자 mike@

사진 | 조은비 기자 juli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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