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동안 지내던 집을 비울 준비가 한창이다. 재건축이 확정되면서, 북적이던 아파트 단지는 점점 ‘유령 단지’가 돼가고 있다. 방과 후 친구들과 즐기던 게임방이, 대학 입학 이후 처음 술 한 모금을 홀짝이던 호프집이, 첫 아르바이트 월급을 조심스레 세어보던 은행이 있던 자리는 <절대출입금지/철거대상건물>이라는 삭막한 표지가 대신하고 있다. 자발적 선택으로 떠나는 집이지만, 사라질 공간의 무게가 몸을 무섭게 짓눌렀다.

  지난 2017년 발생한 포항지진에 대한 원인이 얼마 전 발표됐다. 인근 지열발전소에서 주입한 고압의 물이 근처 단층대를 활성화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수백억 원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고,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집을, ‘공간’을 잃었다. 두 번의 겨울이 지난 지금도 재해는 진행중이다. 200여 명의 주민들이 여전히 이재민으로 등록돼있고, 30~40명의 사람들이 인근 대피소에서 얇은 텐트에 의지해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

  현재 등록된 이재민 중 대부분은 포항시 북구의 한미장관맨션 주민들이다. 포항시는 1988년 설계기준을 적용한 한미장관맨션의 정밀점검 결과 구조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C등급’ 판정을 내렸다. 하지만 주민들이 자체 선정한 전문업체에서 2016년 개정된 구조안정성기준을 적용한 결과 기존보다 심각한 ‘D등급’과 ‘E등급’이라는 판정이 나왔다. 언제 지진이 다시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믿을 수 없는 지자체의 안정성 판단으로 인해 주민들은 익숙했던 그들의 공간이 언제 무너져내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공간의 무게는 꽤 무겁다. 하나의 장소와 공간은 점,선,면으로 이뤄진 텅 빈 공백이 아니라 그 속에서 경험했던 기억들을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간이 사라지고 두려워진다는 것은, 그곳에서 느꼈던 감정들과 추억들이 변해버리는 것과도 같다. 공간의 사라짐이 ‘자발적 선택’이 아닌 하루아침에 발생한 재해로 인한 ‘내몰림’에 기인한다면 내몰린 사람들의 막막함과 분노는 감히 넘겨짚을 수 없을 테다. 재해의 원인은 밝혀졌다. 하루빨리 내몰린 이들의 눈물이 닦이길 바란다.

 

전남혁 기자 mi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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