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사>

 

서정주

향단(香丹)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이 다소굿이 흔들리는 수양버들나무와

벼갯모에 놓이듯한 풀꽃데미로부터,

자잘한 나비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산호(珊瑚)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채색(彩色)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 다오!

 

서(西)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 다오.

향단아.

 

  ‘순수’는 ‘정의’를 보장하지 않는다. <마쓰이 오장 송가>로 가미카제를 찬양하던 친일 시인이자, 내란수괴 전두환에게 찬양시를 지어 바치던 친(親)독재 인사 서정주는 자신을 구속하는 현실의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순수의 하늘을 지향하는 춘향이의 모습에 스스로를 투영했다. 그의 삶은 춘향이가 하늘을 지향했듯, 아름다움만이 존재하는 하얀 원고지 위에 세워진 자신만의 세계로 향했다. 오른손에 굳게 잡힌 펜이 그의 ‘향단이’였던 것이다. 우리는 그를 순수한 인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 그는 순수했다. 하지만 정의롭지는 못했다. ‘투쟁’이라는 이름에 지친 오늘날의 황폐화된 자유주의 사회는 순수함을 미덕으로 바라본다. 울기보다 물기를 택하는 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못하다. 무(無)저항이 곧 저항이라는 모토 아래, ‘깨끗한’ 비폭력 운동의 역사는 강조되어왔다. 하지만 간디의 불복종운동의 저변에는 찬드라 보스나 자와할랄 네루와 같은 이들의 투쟁이 있었다. 킹 목사의 저항은 훌륭했지만 말콤 엑스와 흑표당이 뿌린 피를 간과할 수는 없다. 투쟁은 더러운 것이다. 정치도 더러운 것이다. 하지만 그 더러움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 올바름이다. 예술적인 환각이 주는 허상으로서의 정(情)이 아닌, 사회과학적인 정(正)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어느 게 더 우위에 있는지 가치판단을 내리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 삶의 방식과 가치관이 있는 것이다. 다만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말했듯, “정치는 심산유곡에 핀 한 떨기의 순결한 백합화가 아니라 흙탕물 속에 피어나는 연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정의로워지고 싶은가? 그러면 우선 더러워지자.

박준환 (문과대 한국사학과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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