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홍콩. 밤거리를 채운 가로등이 몽롱하다. 차우(양조위 분)와 리첸(장만옥 분)이 만나 눈빛을 교환한다. 두 사람 모두 배우자가 있지만, 서로가 배우자는 아니다. 외도하는 아내와 남편을 뒀다는 점이 그들을 위로하다가 괴롭힌다. 화양연화의 감독 왕가위는 방향을 잃은 중년의 사랑을 탁월한 미장센으로 그렸다. 그런 화양연화가 좋아 차재민(·34) 씨는 로파이(LO-FI)에 홍콩을 입혔다.

  대낮인데도 조명은 어둡다. 네온사인이 내비치는 분홍과 보라는 서로 얽혀 야릇한 불빛을 낸다. 그늘진 곳에 걸린 그림의 여인이 농염하게 기타를 친다. 너울너울 일렁이는 촛불은 꺼질 듯 말 듯 위태로이, 노래 진동에 맞춰 흔들린다. 흐르는 음악엔 LP판의 잡음이 조화롭게 깔렸다. 音質(음질)劣化(열화)한 장르라는 LO-FI(Low Fidelity) 음악이 은근하니 완숙하다. 평균 음질보다는 떨어지지만 그래도 좋은 느낌이다. 로랑 코르샤의 바이올린 소리가 깊어진다.

  칵테일 화양연화(花樣年華)는 보드카 베이스다. 크렌베리로 맛과 향을 더했고 도수는 18%. 앙증한 체리가 식용장미에 꽂힌 채 가니쉬로 나온다. 어여쁜 색과 향이 18% 도수를 숨기려 하지만,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얼굴이 화끈한 것은 어쩔 수 없다. 홍콩식 라떼 달의 커피는 농밀하다. 에스프레소가 연유와 섞여 단맛을 풍긴다. 잔 위에는 솜이불 모양새로 거품 낸 벨벳우유가 두텁게 올려졌다. 입을 대자 입술에 거품이 푹신하게 묻는다.

  “날 사랑했다는 말인가요?” “나도 모르게. 처음엔 그런 감정이 아니었소. 하지만, 조금씩 바뀌어 갔소.” 차우와 리첸은 그토록 미워한 제 배우자를 닮아가는 자신이 싫었다. 취한 것처럼 순간을 보냈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었다. 호젓한 골목길에서 차우가 끝내 담담히 말한다. “미리 이별연습을 해봅시다.” 리첸이 눈물을 흘린다. “오늘은 안 들어갈래요.”

 

김태훈 기자 foxtr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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