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숨, <흐르는 편지>, 현대문학, 2018.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이면서도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잊혀졌던,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모두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던 역사적인 ‘사건’ 또는 ‘순간’이 있다면 바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일제의 ‘일본군 위안부’ 혹은 ‘정신대’ 강제 동원일 것이다. 강제징용의 경우 우리가 만족할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본 정부는 마지못해 어느 정도까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현재 일본 정부는 강제노역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대신 법적으로 시효가 소멸되었기 때문에 징용 피해자에게 배상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혹은 예전 한일협정 때 이미 한국 정부와 그 문제를 일괄타결 했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강제 징용자들에게 배상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즉 일본 정부는 강제징용 문제는 징용 피해자와 일본의 해당 기업 간의 문제이지 일본 정부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그 누구도 일본 정부의 이러한 주장을 결코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 그런데 최근 과거 우리 정부가 국내의 대형 로펌과 공모해 강제징용 피해자가 일본 정부에 손해배상 청구하는 것을 방해하려 했다는 증거가 공개되어 많은 이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답답함을 넘어 분노가 치민다. 마땅히 분노해야 한다. 일제 강제징용 문제를 보고 있노라면 어찌 되었든 간에 아무리 ‘뻔뻔한’ 일본 정부라 하더라도 역사적으로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만약 증거가 조금이라도 약하다면 당연히 그런 사실이 없었다고 우겼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경우 일본 정부는 강제징용과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인다. 이미 모두 다 알고 있고, 관련된 ‘증거가 차고 넘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한다. 현재는 아예 위안부 사실 자체를 부정한다. 한 때는 “유감이다”, “통석의 염을 금할 수 없다” 등 소극적이나마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 비슷하게 했다. 하지만 이제는 예전에 언제 그랬냐는 듯 이미 했던 사과 비슷한 것도 거둬들이고, 아예 그런 사실이 없었다고 부정한다. 그리고 설령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조선 여인이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지, 결코 일본 정부가 국가 차원에서 지시하거나 주도한 것이 아니라고 역사를 부정한다. 적반하장이라는 말이 이보다 잘 어울릴 수 없다.


  일본의 주장은 전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지만, 더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다. 그들은 우리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일본의 사과를 요구하는 행위 자체를 방해하거나 외교 문제로 비화한다. 예컨대 그들은 일본 대사관 앞을 비롯해 곳곳에 설치된 소녀상을 철거하라고 요구한다. 심지어 불과 몇 년 전에는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 없이 위안부 문제를 돈으로 대충 해결하려 했다. 그러면서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합의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고 선언했다. 하마터면 일본이 원하는 대로 위안부 문제가 처리될 뻔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다행이다.


  주지하듯,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그냥 끝내려 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 자체를 없애려 한다. 그들은 기록으로 남기지 않고 그냥 덮기를 원한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문제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문제 해결에 관련된 어떤 기록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당연히 시작조차 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작이 있어야 한다. 시작이 있어야 끝이 있을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시작이 없으면 끝도 있을 수 없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이미 끝난 사건이 아니라,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사건’이다. 함께 시작해서 함께 끝을 맞이하는 게 가장 좋지만, 그게 안 된다면 우리라도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시작할 때를 위해 우리 스스로 준비를 해 나가야 한다. 그래야 언젠가 그 일을 시작할 때 바로 시작할 수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일반화하자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수많은 이들의 삶은 대개 이렇다. 그들은 말 그대로 ‘꽃 같은 나이’에 일제 또는 일제의 부역꾼에 속아 또는 강제로 종군 위안부로 만주, 동남아 등 전선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을 겪었다. 누군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누군가는 병에 걸려 죽었다. 일제의 패망으로 해방을 맞이했지만,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낯선 타국에서 혹은 타향에서 쓸쓸히 죽어갔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졌다.


  전술했듯이, 일본군 위안부는 분명히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에 의해서 혹은 우리 자신에 의해 망각되었다. 그런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 계기는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MBC TV, 1991~1992년 방영)다. 김성종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드라마는 일제강점기에서 시작하여 해방 이후의 혼란기를 거쳐 한국 전쟁에 이르는 격동의 시대를 다루고 있다.
  줄거리를 간략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주인공 윤여옥(채시라 분)은 경성에서 학교에 다니던 중 모친상을 당한다. 그녀는 집에 몰래 왔다 간 독립운동가 아버지의 행적을 대라고 일본 경찰에게 취조당하고, 결국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어 만주로 끌려간다. 그녀는 정차 중 호송부대의 장교에게 강제로 겁탈당하고, 만주를 거쳐 낙양에 도착해서는 절망 속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다가, 조선인 학도병 최대치(최재성 분)를 만나 그와 사랑에 빠진다. 여옥은 대치의 아이를 갖고 행복에 젖지만, 대치의 부대가 임팔 작전에 투입되는 바람에 그와 헤어지고 만다. 여옥은 아이를 낳으려는 신념으로 굳건히 견디면서 여러 지역을 전전하다 사이판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우연히 위안부 검진을 나온 조선인 학도병 장하림(박상원 분)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위안부 생활을 피하며 조금 편하게 지내게 된다. 미군의 사이판 상륙이 임박하자, 일제는 만행의 증거를 지우기 위해 조선인 위안부들을 집단학살하게 되는데 그 와중에 그녀는 홀로 살아남는다. 요약하자면 여옥은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로 끌려가서 몸과 마음이 무너지며 참담한 생활을 하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그의 아이를 갖고, 또남몰래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의 도움으로 조금 ‘편안한’(?) 생활을 하며 지옥에서 살아남는다. 그 후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난다. <여명의 눈동자>는 한 마디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여옥과 그녀가 사랑한 남자, 그리고 그녀를 사랑한 남자, 이 세 인물 간의 엇갈린 운명과 비극적인 이야기’로 요약된다.


  앞에서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고 말했는데, 사실 국내에 위안부 피해자들의 존재가 구체적으로 실체화된 것은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기자회견이었다. 그 후 사람들이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아주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몇몇 일본군 위안부를 다룬 소설과 영화들이 발표되었다. 개인적인 생각에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한 영화들은 크게 <귀향>(2016)과 <아이 캔 스피크>(2017), 두 계열로 나뉜다. <귀향>은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고통 속에서 절명했던 수많은 소녀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비록 영혼이나마 고향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염원하는” 영화다. 반면 <아이 캔 스피크>(2017)는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살아남은 위안부’의 이야기다. 다시 말하면 <귀향>이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목숨을 잃거나 끊은 피해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영화라면, <아이 캔 스피크>는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그에 상응하는 배상을 요구하는 영화다.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눈길>(2017)과 <허스토리>(2018)는 <귀향>이나 <아이 캔 스피크>와는 비슷하면서도 결이 조금 다르다. 참고로 <눈길>은 먼저 드라마로 제작되었다가 나중에 영화로 제작되었다. 영화는 영애와 종분, 두 소녀가 그 지옥 같은 곳에 어떻게 가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지옥을 어떻게 견디었는지에 방점을 둔다. 결국 둘은 위로하고 위로하면서 그 지옥을 견뎌낸다. <귀향>처럼 아주 끔찍한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욱더 가슴이 먹먹해진다. <허스토리>는 살아남은 위안부와 그들을 도와 그들과 함께 일본 정부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즉 <귀향>과 <허스토리>의 영화적 방점은 ‘연대’에 찍힌다.
  누군가는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는 이제 “충분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심지어는 일본군 위안부를 다룬 영화들이 “다 비슷비슷하고 식상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을 다 비슷비슷하다고 일반화시킬 수도 없거니와, 식상할 정도로 그들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많지도 않았고, 우리 또한 그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지도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아직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는 시작도 안 했다. 당사자들이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 이야기를 쉽게 끝낼 수 있겠는가. 늦었지만 이제라도 그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김숨의 <흐르는 편지>(2018)는 그 시작을 보다 앞당긴다. 작가는 이미 전작 <한 명>(2016)에서 300여 개에 달하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실제 증언을 재구성해 마치 다큐멘터리에 가까울 정도로 치밀한 서사를 보여주었다. 다시 말하면 이 소설은 리얼리티를 극대화함으로써 역사의 잔혹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비공식적인’ 전쟁 위안부인 소설 속 주인공 ‘그녀’는 아픈 기억으로 영원히 짊어진 채 고향으로 되돌아오지만, 더 이상 그녀를 기다리는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 채 하루하루를 숨죽인 채 살아간다. 그러던 중 그녀는 TV에서 마지막 남은 공식적인 전쟁 위안부 피해자가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를 만나러 간다. 요컨대 <한 명>은 현재 살아남은 전쟁위안부가 과거의 끔찍한 기억, 즉 ‘지옥’을 반추하는 이야기다.


  반면 <흐르는 편지>는 ‘인간 지옥’에 머물러 있는 소녀와 그녀와 같은 또 다른 소녀들의 이야기다. 소설은 크게 ‘지옥’에 놓인 소녀들의 처참한 상황에 대한 묘사와 소녀가 그녀가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위안부들의 처참한 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마치 <여명의 눈동자>의 여옥이나 <귀향>에서 소녀들이 겪는 상황을 CCTV가 보여주는 것처럼 사실적이고 차갑다. 그곳에 그들을 향한 연민이나 동정, 그들 간의 연대는 결코 찾아볼 수 없다. 단지 인간의 원초적인 폭력성과 야수성만 들끓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편지를 쓴다. 편지의 발신인인 소녀는 흐르는 강물에 손으로 편지를 쓴다. 그녀는 글을 쓸 줄도 읽을 줄도 모른다. 편지의 수신인인 그녀의 어머니 역시 글을 쓸 줄도 읽을 줄도 모른다. 심지어 주소조차 알지 못한다. 그러니 그 편지는 처음부터 ‘수신 불능’이다. 그녀도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녀는 계속해서 편지를 쓴다. 그녀의 편지는 “어머니, 나는 아이를 가졌어요”에서 시작해 “무슨 죄를 지어서 이 먼 데까지 끌려와 조센삐가 되었을까요”로 끝맺는다. 아이를 갖게 된 게 그녀의 의지가 아닌 것처럼 위안부로 끌려온 것 역시 그녀의 의지가 아니다. 그녀는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지만 아이를 낳으려 한다. 그녀는 <여명의 눈동자>의 여옥처럼 아이의 아버지가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아이를 낳으려 하는 게 아니다. 그녀는 이미 삶에 절망했다. 아이를 통해 삶의 희망을 다시 붙잡으려 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에게 희망이란 이미 사라졌다. 아니 처음부터 희망이란 없었다. 그녀는 단지 그냥 “아이를 낳으려 하는 것뿐이다.”


  <흐르는 편지>의 시간적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이다. 만일 그녀가 일본이 패망한 후 <여명의 눈동자>의 여옥처럼 일본의 집단학살 과정에서 살아남았다면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아마도 그녀는 <한 명>의 그녀처럼 비공식적인 전쟁 위안부로 살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아이 캔 스피크>의 옥분할머니처럼 살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든지 간에 그녀가 겪은 ‘지옥의 연대기’는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이제 충분하다”고 감히 누가 말할 수 있는가? 그녀에게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이제 시작이다.”

윤정용 본교 초빙교수·글로벌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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