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08 01:25 (월)
[고대인의 서재] “아직 시작도 안 했다”
[고대인의 서재] “아직 시작도 안 했다”
  • 고대신문
  • 승인 2019.04.07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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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흐르는 편지>, 현대문학, 2018.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이면서도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잊혀졌던,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모두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던 역사적인 사건을 꼽으라면 당연히 제2차 세계대전 중 일제에 의한 일본군 위안부혹은 정신대강제동원일 것이다. 모두 다 알고 있고, 관련된 증거가 차고 넘치는데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그냥 덮으려 한다. 그들은 문제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해결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문제를 마땅히 해결해야만 한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작이 있어야 한다. 시작이 있어야 비로소 끝이 있을 수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끝난 사건이 아니라,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사건이다. 함께 시작해서 함께 끝을 맺는 게 가장 좋겠지만, 그게 안 된다면 우리라도 시작해야 한다.

  김숨의 <흐르는 편지>(2018)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의 시작을 앞당긴다. ‘인간 지옥에 머물러 있는 소녀와 그녀와 같은 또 다른 소녀들의 이야기인 이 소설은 지옥에 놓인 소녀들의 처참한 상황에 대한 묘사와 소녀가 그녀가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소설 속 위안부들의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다.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지독할 정도로 차갑고 냉정하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이 더 슬프고 비극적이다. 서로를 향한 연민이나 동정, 연대는 결코 찾아볼 수 없고, 단지 인간의 원초적인 폭력성과 야수성만 들끓을 뿐이다.

  <흐르는 편지>에서 그녀는 흐르는 강물에 손으로 편지를 쓴다. 사실 그녀는 글을 쓸 줄도 읽을 줄도 모른다. 편지의 수신인인 그녀의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주소조차 알지 못한다. 그러니 그 편지는 처음부터 수신 불능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계속해서 편지를 쓴다. 편지는 어머니, 나는 아이를 가졌어요에서 시작해 무슨 죄를 지어서 이 먼 데까지 끌려와 조센삐가 되었을까요로 끝을 맺는다. 그녀는 아비도 모르는 아이를 낳으려 하는데, 아이를 통해 삶의 희망을 다시 붙잡으려 하는 게 절대 아니다. 그녀에게 처음부터 희망이란 없었다. 그녀는 단지 그냥 아이를 낳으려 하는 것뿐이다.”

  만일 그녀가 일본이 패망한 후 <여명의 눈동자>(MBC TV드라마, 19911992년 방영)의 여옥처럼 일본의 집단학살에서 살아남았다면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작가의 전작인 <한 명>(2016)의 그녀처럼 비공식적인 전쟁 위안부로 살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아이 캔 스피크>(2017)의 옥분할머니처럼 살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든지 간에 그녀가 겪은 지옥의 연대기는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지옥을 견딘 그녀에게 이제 충분하다고 감히 누가 말할 수 있는가? 그녀에게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이제 시작이다.”

윤정용 본교 초빙교수·글로벌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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