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24 18:35 (금)
인쇄·출판물이 길러낸 보성인, 그들이 지켜낸 조국
인쇄·출판물이 길러낸 보성인, 그들이 지켜낸 조국
  • 정한솔 기자
  • 승인 2019.05.08 15: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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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중후반의 수송동 교사 정문과 보성사 간판
사진제공| 고려대학교 박물관
수송공원엔 보성사 역사를 기록한 현판이 있다.

  출판보국(出版保國). 책을 펴냄으로써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다. 일제의 국권침탈 시기에 보성전문학교와 함께 설립된 인쇄소보성사와 출판사 보성관은 ‘출판보국’이라는 이념 아래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활자와 종이로 나라를 지킨다는 보성사와 보성관의 정신은 오늘날 어떻게 기억돼야 할까.

 

  책으로 지식의 민주화 일궈낸 보성관

  1900년대 초는 인쇄기를 갖춘 민간 출판사가 하나둘씩 들어서던 시기였다. 보성사와 보성관은 민족 교육을 위한 서적을 구하기 어려웠던 시대에, 우리 힘으로 책을 발간하고자 현재 조계사가 위치한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터를 잡았다.

  정확한 설립 시기를 두고는 의견이 나뉘지만 1905년 보성학원과 함께 설립됐을 가능성이 가장 유력하다. 권두연(한세대 교양학부) 교수는 “당시 자료를 보면 1905년 설립설과 1906년 9월 설립설이 있고, 1907년에 회사 설립 신고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며“하지만 보성관에서 최초로 출판한 <동국사략>이 1906년 6월에 나온 것을 보면 1905년에 보성학원과 함께 설립됐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보성사와 보성관은 보성학원의 부속기관으로 출발했다. 주로 보성중학교 교사와 교장, 보성전문학교 교수들이 책 출판에 관여하면서 학생 교육에 기여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보성의 모든 학생은 평등하게 교육받아야 한다’는 기치 아래 모든 교재를 무상 제공했다는 것이다. 일례로 초창기 보성관에서 만든 <윤리학 교과서>는 정가가 표기돼있지 않다. 권두연 교수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출판권과 전문지식은 국가, 지식인이 독점하고 있었다”며 “보성관을 필두로 다양한 출판물이 나오면서 지식의 민주화가 실현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보성학원이 명문사학으로 거듭나면서, 보성사와 보성관도 민간 출판사와 비슷한 규모로 성장했다. 이에 따라 교과서 외에도<월남만국사>, <오위인소역사>를 비롯해 유명한 외국 역사 서적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다른 국가들의 흥망성쇠와 유명한 위인들의 삶을 통해 학생들의 역사의식을 고취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재 번역에는 보성학원 교사들뿐 아니라 외국어에 능통하고 해당 분야에 깊은 지식을 가진 전문 번역인력이 동원됐다. 하지만 1910년 국권이 일제의 손에 넘어가면서 보성관 번역원들이 전문서적을 출판하는 일은 점차 줄어들게 됐다. 권두연 교수는 “나라가 망하면서 보성관도 같이 운명했다고 볼 수 있다”며 “다만 인쇄기만 있다면 출판도 가능했기에, 이후엔 보성사에서 인쇄와 출판을 모두 담당했다”고 설명했다.

 

  활자가 세상을 만세로 물들이다

  보성사와 보성관의 역할은 단지 인쇄 및 출판에 머무르지 않았다. 민중 계몽을 향한 강렬한 의지를 바탕으로, 나라를 다시 세우고 독립하겠다는 열망을 곳곳에 전파했다. 1907년부터 대대적으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의 핵심이 됐던 잡지 <야뢰>가 대표적인 사례다. <야뢰>는 국채보상운동과 관련된 기사를 보도하고, 국가의 빚을 갚기 위해 선뜻 지원금을 낸 사람들의 명단을 공개하는 잡지였다. 오영근을 비롯해 <야뢰> 발행에 관여한 인물들은 대부분 보성관 출신이었고, 인쇄 역시 보성사에서 도맡아 했다.

  이렇듯 1900년대부터 국채보상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보성사와 보성관은 당대에도 높은 평가를 받으며 출판업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학자이자 문인이었던 최남선도 1908년 보성사와 보성관을 참고해 당시 최대 규모의 출판사 ‘신문관’을 설립했다. 최남선은 회고를 통해 ‘이용익이 보성사와 보성관을 설립한 것을 보고 나도 문화운동에 참여하기로 다짐했다’고 밝혔다.

  1910년 보성학원이 천도교에 인수된 후에도 보성사의 활약은 계속됐다. 보성사는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다. 이 일이 발각되면 투옥될 것을 알면서도 보성사원들은 굳건한 의지로 임무를 수행했다. 권두연 교수는 “보성사 직원들이 체포를 각오하면서까지 이 일을 맡았다”며 “1905년부터 이어진 출판보국의 신념이 없었다면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후 3.1운동 주도세력과 독립선언서 인쇄자들이 모두 체포·투옥되면서 보성사도 쇠퇴의 국면으로 들어섰다. 현재는 종로 수송공원에 그 터만 남아있다. 권두연 교수는 “당시 보성사와 보성관은 활자 하나, 종이 한 장, 책 한 권으로 세상을 움직였다”며 “고려대 학생들도 이러한 보성사, 보성관의 정신을 되새기면서 지성인의 역할을 다했으면 한다”고 전했다.

 

글│정한솔 기자 delta@

사진│이수빈 기자 suvv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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