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수도, 인구 1000만 명의 대도시 서울의 뿌리는 어디일까. 많은 사람들은 수도 서울의 시작을 조선의 한양 천도라고 인식한다. 하지만 조선 왕실이 한양으로 천도하기 약 1400년 전부터 한강 일대는 이미 백제의 수도로 기능하고 있었다. 500년의 역사를 가진 한성 백제180여 년간의 웅진사비 백제에 비해 덜 알려져 있고, 정확한 초기 백제 도읍지의 위치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다. 해상왕국 백제의 전성기를 함께한 백제의 왕도는 어디며,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을까.

 

  위례성에서 한성까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사료에 의하면 초창기 백제의 왕성은 위례성이다. ‘위례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고대에 한강을 일컫는 아리수아리에서 기원했다는 설 백제시대 왕을 가리키는 어라하어라에서 기원했다는 설 성을 둘러싼 우리’, ‘울타리에서 그 어원을 찾고 있는 설 등이 있지만, 아직 그 정확한 어원은 밝혀지지 않았다.

  위례성을 둘러싼 쟁점 중 한 가지는 그 초기 위치가 하북(河北)이었는지 하남(河南)이었는지의 여부다. 이는 백제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사기> 내 충돌하는 두 기록에 근거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즉위년기의 기사(記事)에서는 오직 하남의 땅만이 북쪽으로는 한수(漢水)가 흐르고, 남으로는 넓은 옥택이 펼쳐져있다는 십신(十臣)의 조언으로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14년 기사에 의하면 온조왕은 동쪽의 낙랑, 북쪽의 말갈 등 외적의 침략을 우려해 한수의 남쪽, 즉 하남으로 위례성의 민호를 옮기는 천도를 실시했다.

  전자에 기록에 의하면 온조는 처음 도읍을 정할 때부터 하남, 즉 한수의 남쪽에 터를 잡았고, 기사에서도 하남위례성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후자에 기록에 의하면 천도가 이뤄지기 전 초기 위례성의 위치는 하남이 아닌 한수의 이북이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학계에서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두고 위례성이 처음부터 하남에 위치했는지, 하북에서 하남으로 천도한 것인지에 대해 견해가 맞서고 있지만, 아직 한강의 북쪽에 백제의 왕성이 있었다는 확실한 물증은 발견되지 않은 상태다. 이혁희 한성백제박물관 백제학연구소 학예연구사는 한강의 남쪽에는 풍납토성, 몽촌토성 등의 성곽이 발견되지만, 현재 한강의 북쪽에는 고고학적으로 위례성으로 비정(比定)할 만한 성곽이 확인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위례성은 이후 한성(漢城)으로 확대, 발전한다. 사료와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한성 백제의 왕성은 서울시 송파구 일대의 풍납동 토성이었으며, 인근의 몽촌토성으로 한번 이사한 이후 두 개의 왕성이 도읍지의 역할을 했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26년 기사에서 겨울에 왕이 태자와 함께 한산으로 이도(移都)했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서정석(공주대 문화재보존과학과) 교수는 풍납동 토성에서 몽촌토성으로 이사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왕도 한성에는 풍납동토성과 몽촌토성이라는 두 개의 성곽이 출현하게 된다이 두 성이 마침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어 풍납동토성을 북성, 몽촌토성을 남성으로 부르고 있다고 말했다.

  풍납동 토성이 몽촌토성보다 먼저 만들어졌다는 고고학적 근거도 있다. 이혁희 학예연구사는 풍납에서 확인되는 백제 토기의 시간적인 폭이 300~400년이라면, 몽촌 토기는 200년 남짓이라며 이는 풍납동 토성이 먼저 만들어지고 몽촌이 나중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한성백제박물관에는 백제의 북성과 남성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복원도가 전시돼있다.

 

  왕성으로 추측되는 풍납과 몽촌토성

  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이 한성백제의 도읍지로 여겨지는 것은 발굴 조사에서 출토되고 있는 유물에 근거한다. 풍납토성이 왕성임을 추측할 수 있게 하는 대표적 유물은 성 내부의 하수관으로 추정되는 토관(土管)이다. 하수관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규격으로 아귀가 맞는 수천 개의 토관을 만들고 땅에 묻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수백 명의 기술자를 장기간 동원할 수 있는 기술력, 경제력, 권력이 필요했으며, 4~5세기 무렵 백제에서 이런 능력을 종합적으로 행사할 수 있었던 이는 왕 또는 그 주변 인물들이었다. 이혁희 학예연구사는 복잡한 토관으로 물이 빠져나가는 시설을 갖추는 과정에는 큰 권력과 기획성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수천 장이 발견되고 있는 기와도 거대 권력이 한강 유역에 존재했다는 근거가 된다. 서정석 교수는 한성기 유적 중 풍납동에서 가장 많이 출토된 유물은 기와라며 삼국시대 기와는 왕궁, 사찰, 관공서 등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기에 기와가 출토된다는 것은 한강 유역에 관련 시설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백제의 도읍지에서 중앙민들이 흔하게 사용하던 한성 양식의 유물들이 지방에서는 유력자의 건물, 무덤 등에서 드물게 출토되는 것도 백제 한성의 위상을 설명할 수 있다. 또 고배, 기대, 삼족기 등 다양한 종류를 가진 한성 양식의 토기들 중에서는 한성을 벗어나면 탈락하는 종류가 발생한다는 점도 한성이 초기 백제의 중심지였음을 증명한다.

  신라나 가야에는 없는 중국제 토기들이 발견된다는 것도 특징이다. 초기 백제 토기의 특징은 유약을 인위적으로 바르지 않았다는 것인데, 풍납토성에서는 유약을 바른 중국제 토기들이 등장한다. 이혁희 학예연구사는 중국제 토기가 발견된다는 것은 중국 토기를 소비할 수 있었던 당대의 권력층이 한성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한강이라는 창구를 통해 백제인들이 중국과 활발한 교류를 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몽촌토성의 남서부에는 방이동고분군, 가락동고분군, 석촌동고분군 등의 왕릉지구가 펼쳐져 있다. 몽촌토성을 중심으로 그 북서부에는 풍납동 토성이, 남서부에는 왕릉이 배치된 양상이다. 이처럼 왕성과 왕릉이 같은 지역에 위치해 있다는 점도 송파구 일대가 도읍지임을 보여준다. 서정석 교수는 왕성과 왕릉, 그리고 사찰은 삼국시대 도읍지를 보여주는 세 가지 유적이라며 아직 사찰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그리고 석촌동고분군 등의 고분군을 통해 송파구 일대를 백제의 도읍지로 추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500년 역사, 한성백제의 기억

  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의 관계는 어땠을까. 이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평지성과 군사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배후의 산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평상시에는 평지성에서 왕과 백성이 함께 생활했으며, 외침 등 유사시에는 산성으로 피신해 농성을 벌였다. 풍납동 토성에서 토기나 도자기 등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유물이 많이 출토되고, 몽촌토성에서 군사적 목적의 유물이 많이 발견되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한성백제박물관 백제학연구소 이장웅 학예연구사는 압록강 바로 북쪽에 국내성이 위치하고 그 배후에 군사적 목적의 환도산성이 있었던 고구려의 경우처럼, 같은 부여 계통이던 백제도 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을 각각 평지성과 산성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몽촌토성은 산성이라 보기에는 그 고도가 가파르지 않고, 풍납동 토성과의 통행이 상당히 유리하기에 군사적 목적만을 위해 사용된 산성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실제 몽촌토성은 산이 아닌 야트막한 구릉지 형태이며, 몽촌토성 북문과 풍납토성을 잇는 10미터 폭의 정비된 교통로가 발견된다는 것도 이를 방증한다. 서정석 교수는 몽촌토성은 유사시 농성하기 위한 용도가 아닌 평소에 왕이 거처하던 곳이라 본다그 규모가 커 백성과 왕이 같이 거주하던 풍납동 토성에서 왕의 전용공간인 몽촌토성으로 왕의 거처를 옮김으로써 왕의 권위를 세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강 유역에서 찬란한 문화를 영위하던 백제는, 개로왕 21(475)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한성을 빼앗기고 만다. 그 후 도읍지로서의 한성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이성계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까지 약 1000년 동안 잊혀졌다. 현재 백제는 무령왕릉, 낙화암으로 대표되는 공주와 부여의 역사로 기억되고 있다. 이는 지자체의 홍보 부족과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유적의 보존에 기인한다. 이혁희 학예연구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울시는 ‘2000년 수도서울이 아닌 ‘600년 수도서울로 지역 홍보를 내세웠다그만큼 서울의 백제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장웅 학예연구사는 결국 사료가 적게 남아있는 것이 한성백제에 대한 인식 저하의 원인이라며 한성백제의 주 무대였던 서울 강남지역의 1970년대 개발로 인해 유물 보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점도 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학계 밖에서는 한성백제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가 높지 않았다. 하지만 1997년 풍납동 유적이 본격적으로 발굴되면서 초기 백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겨났다. 서울시도 송파구, 충남 공주시와 부여군, 전북 익산시 등 지자체와 함께 이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에 한성백제 유적의 확장등재를 추진하는 등 한성백제 부활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서정석 교수는 서울에는 풍납동토성이나 몽촌토성과 같은 성곽이 있고, 석촌동고분군에는 독특한 적석총이 자리하고 있다지금부터라도 한성백제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히 이뤄진다면 백제의 도읍지로서 최전성기를 누리던 한성의 모습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남혁 기자 mi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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