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라
연세대 빈곤문제국제개발연구원 전문연구원

  1970년대 인적자원관리분야에서 시작된 일-생활 균형은 더 이상 일부의 언어가 아니다. 일생활의 균형(Work-Life Balance)의 약자인 ‘워라밸’이 일상용어로 쓰일 만큼 이에 대한 관심은 전사회적으로 높고, 사회정책적으로는 어린자녀가 있는 부모들이 주 타겟이 된다. 생애주기상 일터와 가족의 요구가 가장 큰 시기를 살아가는 이들은 시간압박과 갈등을 호소하고 있다. 그 정도는 사회적재생산 위기의 한 원인으로 지적될 만큼 심각하다.

  우리는 왜, 어린자녀를 돌볼 시간이 없을 정도로 시간이 없을까? 우리는 왜 어린이집과 유치원으로도 모자라 조부모가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가야 하나? 저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과도한 노동중심성이 아닐까 싶다. 개인의 일상에서, 노동중심적인 삶은 장시간노동으로 가장 잘 드러난다. 2017년 기준으로 한국의 취업자1인당 연간노동시간은 2024시간으로 OECD 국가 평균 1746시간보다 278시간이 길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멕시코에 이어 2위이며, 노동시간이 가장 짧은 독일보다는 넉 달 더 일하는 셈이 된다.

  가족시간을 방해하는 노동중심적인 생활패턴은 노동시간의 양만이 문제가 아니다. 가족 친화적이지 않은 노동 스케줄도 문제가 된다. 모두가 퇴근하는 저녁시간대에 일하는 자영업자들은 언제 가족시간을 보낼까? 부부가 서로 바통을 넘겨주며 다른 시간대에 일하는 부부는 어떻게 친밀감을 나눌까? 오후시간이나 야간, 주말에 일하는 비표준시간대 노동자(nonstandard work time worker)에게 가족과의 집밥, 저녁이 있는 삶, 주말가족여행은 로망에 머물기 쉽다.

  노동중심성과 함께 일-생활 불균형의 또 다른 한 축을 담당하는 것은 젠더불균형이다. 유연노동과 서비스업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확대되고 외벌이 남성에게 주어지던 가족임금이 불안정해지면서 맞벌이가구의 비중은 늘고 있다. 문제는 여성의 유급노동시간 증가에 비해, 남성의 가사참여가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2014년 통계청의 생활시간조사에 의하면, 맞벌이 가구 남성의 가사시간은 40분이지만, 여성의 가사시간은 남성의 5배 정도인 3시간 14분에 달한다. 맞벌이 여성들은 여성의 변화에 비해 가정과 기업의 변화는 더딘 ‘지체된 혁명’ 속에서, 일-가사의 ‘이중부담’을 짊어지고, 승진이나 보상의 기회는 포기해야 하는 ‘마미트랙’을 걷고 있다.

  워라밸의 달성을 위한 해법은 무엇일까? 과도한 노동중심성에서 탈피가 우선돼야 함은 자명하다. 여기에는 장시간노동 문화의 근절 뿐 아니라 비표준시간대 노동에 대한 재고도 포함된다. 24시간 사회는 가처분 시간이 확대된 것으로 긍정적 해석도 가능하지만, 24시간 사회를 굴리는 비표준시간대 노동자들이 어떤 조건 하에 일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비표준시간대 노동이 인간의 자연리듬을 거스르는 것임을 알고 충분한 보상이 주어지는지 모니터해야 한다. 여기에는 일상의 편리를 잠시 거두고 24시간 시스템이 필수적인 것인지 숙고해보고, 불필요할 경우 이를 지양하는 결단도 포함돼야 할 것이다.

  돌봄의 사회화도 중요하다. 이는 보육 및 노인돌봄에 대한 공적서비스 확충으로 실현될 것이다. 돌봄의 사회화는 여가시간을 줄여서라도 가족시간을 확보하려 애쓰는 맞벌이부모, 가족책임으로 노동시장 진출에 제약을 받았던 여성에게 환영받을 만하다. 여기서 돌봄의 사회화만 강조하는 것은 위험하다. 돌봄에 대한 노출이 적어지면 실제로 돌봄에 취약해지고, 돌봄은 안 해도 되는 것, 안 할수록 좋은 것이라 여기기 쉽다. 하지만 인구구조의 변화로 돌봄에 대한 사회적 수요는 커지고 있으며, 기계화·자동화의 과정에서 돌봄의 상대적 비용은 높아지고 있다. 돌봄의 사회화 정도가 큰 서구사회에서도 돌봄가치가 재조명되면서 돌봄의 권리가 강조되고 있다.

  부모가 직접 돌봄을 하면서 얻게 되는 헌신감과 희열감은 돌봄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특히, 남성의 돌봄결합은 가족책임의 분담을 넘어 젠더갈등 해소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돌봄의 가치를 긍정하는 개인의 인식이 가족을 넘어 사회로 이어질 때, 시장가치와 돌봄가치의 대립, 일-생활 균형을 침해하는 과도한 노동중심성은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