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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인의 서재] 자본주의의 우울한 초상
[고대인의 서재] 자본주의의 우울한 초상
  • 고대신문
  • 승인 2019.05.20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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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과, <N.E.W>, 문학과지성사, 2018.<br>
김사과, <N.E.W>, 문학과지성사, 2018.

 

  진화생물학자인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역작 <, , >(1997)에서 인류 역사와 문명이 무엇을 통해 어떻게 발전했는가라는 인문학적 논제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역사를 통해 추론하듯 풀어간다. 그는 역사 속에서 야만과 문명을 분리하지 않고, 야만이 바로 문명의 심장부인 도시에서 발견된다고 이야기하며 구분이 아닌 교차점에서 역사를 바라본다. 무엇보다도 그의 시선에는 제국주의의 편견이나 그릇된 시선, 특히 동양에 대한 왜곡된 시선이 들어있지 않다. 한 마디로 <, , >는 광범위하게 나타난 역사의 경향을 실제로 만들어낸 환경적 요소들을 밝힘으로써, 인종주의적 이론의 허구를 벗겨낸 현대 고전이다.

 

  처음부터 <, , >를 염두에 두었는지 모르겠지만, 김사과의 소설 <N.E.W>의 제목은 <, , >를 떠올리게 한다. 참고로 NNeurology, EElectricity, WWar를 각각 의미한다. 작품의 제목 NEW는 이 세 단어의 앞글자로 이루어진 두문자어’(acronym). <, , >에서는 총, 세균, 철이 세계역사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추적하면서 서구의 인종주의를 비판하는 데 방점을 두고 있다면, <N.E.W>는 신경학, 전기, 전쟁이 현대 사회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웅변하고, 그것을 거스르면 안 된다고 역설한다. 물론 NEW는 두문자어가 아닌 그냥 하나의 단어로는 당연히 새롭다는 뜻을 갖는다. 제목 때문인지 소설 <N.E.W>의 이야기는 무척 새롭다. 그런데 그 새로운 이야기가 낯설고 조금은 불편하다.

  소설 <N.E.W>의 구성은 비교적 간단하다. 소설은 이야기의 시작’, ‘1’, ‘2’, ‘3’, ‘악몽의 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야기의 시작이 프롤로그라면 악몽의 끝은 에필로그에 해당한다. 소설의 시작은 이렇다. “사랑하는 사람은 보드라운 살갗을 만질 때 가장 기분이 좋다고 정지용은 주장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찢어 놓는 데 아주 잠깐의 시간이면 충분하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여러 번 읽어 보았지만 정확히 무슨 말인지 그 의미가 쉽게 와 닿지 않는다.

 

  <N.E.W>는 정지용의 출생으로 시작한다. 그가 태어났을 때 할머니는 얼마 전 오랜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고, 할아버지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식물인간 상태고, 아버지 정대철은 행적이 수상했다. 그는 바야흐로 포스트모던한 세계 속에 성공적으로 첫발을 디딘 것이다.” 얼마 후 어머니 은미라는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정대철은 경영권을 완전히 장악한 후 회사를 재벌기업으로 성장시키고, 정지용은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재벌 후계자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본격적인 사건은 그렇게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정지용이 최영주와 결혼하고 이하나를 우연히 만나면서부터다. 최영주는 정지용과 이하나 사이를 의심해 사람을 시켜 그들을 미행하고, 정지용은 이하나와의 관계를 숨기지도 않고 그렇다고 대놓고 드러내지도 않는다. 이하나는 그런 정지용에게 점점 집착한다. 거칠게 말하면 소설 <N.E.W>는 재벌가 후계자 정지용, 스펙으로 따지자면 정지용보다 훨씬 뛰어난 최영주, 정지용에게 집착하면서 동시에 최영주를 부러워하면서 시기하는 이하나, 이 세 사람의 흔하디흔한 사랑 이야기. 그리고 이 세 명의 삼각관계 속에 성공자와 이우진이 간헐적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N.E.W>는 다른 연애 이야기와 사뭇 다르다. 왜냐하면 등장인물을 추동하는 동력은 사랑, 연민, 증오, 질투와 같은 사랑에서 비롯된 감정이 아니라 바로 욕망또는 탐욕이기 때문이다. 정지용은 생물학적으로 아버지이자 오손 그룹의 회장인 정대철을 욕망한다. 엄밀히 말하면 그는 정대철이 아니라 정대철로부터 물려받을 회사를 욕망한다. 언젠가 회사를 물려받겠지만 그는 그 때까지 편안히 기다릴 수 없다. 그래서 당장 회사를 물려받기 위해 혹은 자신을 무시하는 아버지에게 나름의 복수를 한다.

최영주 또한 정지용만큼이나 욕망에 의해 추동된다. 일단 그녀는 정지용보다 스펙이 좋다. 그녀의 아버지가 Y대 의대 교수이고, 어머니는 인문학부 교수다. 외할아버지는 비록 인사청문회 때 망신을 당하기는 했지만 Y대 총장이다. 그녀는 어머니 홍교수의 정보력과 인맥으로 정지용과 정략결혼을 하지만, 결혼 뒤에는 정지용을 넘어 오손 그룹을 차지하겠다는 욕망을 꿈꾼다.

 

  이하나의 직업은 유투버다. 그녀는 운 좋게 정지용과 최영주가 사는 메종드레브에 입주한다. 물론 같은 곳에 산다고 삶이 같지는 않다. 흔히 말하듯 사는 곳은 같아도 풍경이 다르다’. 그녀의 공간은 5평짜리 원룸인데 반해, 정지용과 최영주가 사는 공간은 200평짜리 저택이기 때문이다. 사실 메종드레브는 정대철의 미래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그는 가난한 자들은 부유한 자들과 완전히 섞여서도 안 되지만 완전히 격리되어서도 안 된다는 철학을 갖고 있고, 메종드레브는 그의 철학의 산물이다. 즉 그는 가난한 자들의 욕망을 추동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관리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고졸에 아무 스펙도 없는이하나는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다가 유투브 방송으로 소위 대박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녀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 큰 욕망을 꿈꾸고 있다. 조력자인 성공자의 제안에 따라 그녀는 삼다수 대신에 에비앙을 마시오이 향 비누 대신에 이솝의 라벤더 향 핸드워시를 사용하최고급 국산 면으로 만든 팬티 대신에 백화점에서 파는 한 장에 38천원 짜리 메이드 인 오스트리아의 백 퍼센트 나일론 팬티를 입었다. 이하나는 성공자의 이론에 엄청난 의혹을 느끼면서도 주춤주춤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계속해서 나아간다.

 

  참고로 성공자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어린 시절 판자촌에서 보낸 성공자는 이름 그대로 성공하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죽고 어머니는 집을 나가면서 그의 인생은 부모의 그것처럼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그 후 그의 인생은 지리멸렬하다. 그래도 가장 성공한 것을 꼽으라면 점쟁이 행세를 해서 성공한 역술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도박에 빠져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메종드레브 근처에서 왕만두 칼국수 집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는 기적처럼 이하나를 만나 그녀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 인생을 살겠다고 다짐한다. 어찌 보면 그는 이하나를 통해 성공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대신 채우려 하는지 모른다.

  정지용과 이하나의 만남은 상황의 발단상황의 전개’, ‘상황의 절정을 거쳐 마침내 꼭대기까지 이른다. 이하나는 정지용을 만난 후의 삶을 꽃밭의 삶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그녀는 한편으로는 현재의 안온한 삶에 만족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따금씩 바닥이 보이지 않는 불안에 사로잡혔다.” 그녀의 불안은 최영주라는 존재의 인식과 자신을 향한 정지용의 사랑의 불신에서 비롯된다.

 

  최영주는 정지용과의 결혼 후 많은 것들이 이해가 되지 않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아버지의 충고대로 매사에 극도로 조심하면서 살아가는 게 적절한 삶의 처세술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큰 힘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자신의 공격성을 감추었고 그게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녀는 자신의 이론의 치명적인 허점을 깨닫게 되었다.” 즉 상대방도 자신을 공격할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녀에게는 그것은 엄청난 발견이었다.”

  이하나는 우연히 만난 이우진으로부터 의 중요성에 대해 듣는다. 즉 이우진의 말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메시지보다는 메신저가 훨씬 더 중요하다. 이하나는 이우진과 헤어지면서 에 대해 어렴풋이 생각한다. 남녀 간의 연애에 힘 또는 권력 관계를 적용하면 이하나는 정지용에게 완전히 밀린다. 아니 이하나는 정지용에게 완전히 종속되었다. 이하나도 알고 있고 정지용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그녀에게 준 팔찌는 서로 간의 사랑의 증표가 아니라 그들 간의 종속 관계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기표.

 

  정지용은 이하나를 완전히 종속시킨 뒤 그의 머릿속은 그녀에 대한 생각보다도 최영주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그녀와 함께 하와이, LA, 뉴욕에서 3주를 보낸다. 최영주는 끝내야 할, 반드시 승리해야 할 그녀만의 싸움이 있었기 때문에 출산을 위해 돌아간다. 그녀는 욕망이 실현되는 게 아니라 욕망은 실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녀는 출산 뒤 모유 수유를 하지 못하게 되는 사실에 절망한다. 자신이 정지용을 경멸해왔다는 사실 또한 깨닫는다. 그녀는 냉혹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과 환상을 유지하는 것 가운데 고민하다가 결국 환상을 유지하는 쪽을 택한다. 그녀는 환상을 유지한 채 거짓말 같은 우연이자신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하나는 정지용이 최영주의 임신으로 자신에게 소원하게 대하자 술김에 정지용이 준 팔찌를 성공자에게 주었고 정지용에게는 팔찌를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지용은 그녀가 성공자에게 팔찌를 준 사실을 알고 있고, 그녀에게 또 다른 팔찌를 선물한다.

  정대철은 회사의 프로젝트를 성공시켰지만 언제나처럼 안도감과 의혹에 동시에 사로잡혀 있다. 사실 그는 자신에 대한 항간의 루머를 수집하고 치밀한 언론플레이로 회사를 지키고 키웠다. 아들 정지용은 아버지 정대철이 모든 것을 치밀하게 의도하고 실행해왔으며 그 결과에 엄청난 쾌락을 느낀다는 것을 잘 알았다.” 정지용은 삶 자체가 연극인 아버지, 그것 때문에 고통을 받은 어머니를 동정하고 용서했다. 하지만 그가 부모를 동정하고 용서하는 것은 부모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고결한 삶을 위해서다.

 

  정지용과 최영주는 정대철의 프로젝트와는 전혀 다른 최종 프로젝트, 즉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실행한다. 그런데 그들의 최종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같이 기획한 공동 프로젝트가 아니라 목표가 같은 우연한 개별 프로젝트다. 즉 정지용과 최영주가 처음부터 함께 계획하고 실행한 게 아니라 우연하게도 정대철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목표가 같았을 뿐이다. 최영주는 이우진을 고용해 자기 아들을 구덩이에 던지는 페이크 다큐를 찍고, 정지용은 정대철에게 약이 든 물을 건넨다. 결국 정지용과 최영주는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한다. 지용은 쓰러진 정대철을 대신해 회사를 순조롭게 물려받았고, 최영주는 태어난 지 1년도 안 된 아이를 잃은 슬픈 어머니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욕망이 성취되는 대가는 너무나 가혹했다. 이하나는 팔 하나를 잃었고, 정대철은 기계에 의존한 채로 1년 남짓 생명을 유지해야만 했다. 위안이라면 이하나는 팔을 잃은 대신 빳빳한 5만 원짜리 지폐들로 가득 채워진 가방을 받았다. 이후 그녀는 얼마 전부터 자신의 통장에 모르는 이름의 사람들에게서 종종 고액의 현금이 입금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정대철은 자신이 갖고 있던 것을 다 빼앗겼다. 좋게 표현하자면 아들에게 물려주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우진은 최영주의 계획을 도운 대가로 처음에 약속한 돈의 열 배를 받았다. “잘 부탁드립니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말이다. 대신 그는 한쪽 팔이 잘린 이하나를 보며 내일도 내가 살아 있을지 모르겠다라는 말을 반복한다. 그리고는 이하나의 잘린 팔에 시선이 닿을 때마다 깜짝 놀란다.

 

  욕망의 성취라는 측면에서 보면 김사과의 <N.E.W>는 나름 해피엔딩이다. 정지용과 최영주는 오손 그룹을 손에 넣었고, 이하나와 이우진은 그토록 원했던 돈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지용과 최영주, 이하나와 이우진이 과연 행복할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정지용과 최영주는 ()부모 정대철과 은미라의 또 다른 버전이기에 정대철과 은미라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삶에도 행복이 들어갈 자리는 없어 보인다. 이하나와 이우진 역시 돈은 얻었을지 몰라도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고통과 불안감에 시달린다. 욕망의 대가로서는 너무나 가혹하고 잔인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하나는 텅 빈 거실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돈으로 가득 찬 커다란 쇼핑백을 보며 지겨운 사람들, 언제까지 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갖다 놓을 거야라며 우울해한다. <N.E.W>는 모든 것, 심지어는 사람까지도 돈으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자본주의의 우울한 초상을 보여준다. 그 우울함의 근원에는 욕망이 있다. 채우려 해도 결코 채울 수 없는 욕망 말이다. 끝으로 사람은 얼마나 많은 돈을 가져야 행복할까, 라는 질문을 씁쓸히 던져 본다. 욕망의 관점에서 보자면 아무리 많은 돈을 가져도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를 추동하는 것은 욕망의 크기에 상관없이 결핍된 욕망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소설을 시작하는 첫 문장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사랑하는 사람은 보드라운 살갗을 만질 때 가장 기분이 좋다고 정지용은 주장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찢어 놓는 데 아주 잠깐의 시간이면 충분하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소설의 결말을 통해 이 문장을 해독하면, 정지용은 이하나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의 몸을 아주 잠깐의 시간 안에 찢어 놓은 것이다. 정지용은 자신의 그런 행동에 만족해하고 심지어 이하나가 자신에게 감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팔이 찢어진이하나는 정지용을 원망하기보다는 돈으로 가득 찬 커다란 쇼핑백을 보며 권태로움을 느끼고 심지어 우울해한다. 결국 결핍된 욕망을 상쇄하는 것은 뒤틀린 사랑인가? 아니면 뒤틀린 사랑이 결핍된 욕망을 추동하는 것인가? 뭐가 먼저고 뭐가 나중인지 잘 모르겠다. 혼란스럽기만 하다.

 

윤정용 본교 초빙교수글로벌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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