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은 연기를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꽤 흥미진진한 논점을 제시하는 드라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찰리(플로렌스 퓨)가 무명배우라는 지점이 우선 그렇다. 만일 이런 지점이 없었다면 <리틀 드러머 걸>은 그저 평범한 스파이 장르에 머물렀을 수 있다. 하지만 스파이 대신 연기자를 작전에 투입한다는 이 드라마의 기가 막힌 설정은 이 작품을 스파이 장르 그 이상의 재미와 성취를 만들어낸 중요한 요인이다.

  스파이 소설의 대가 존 르 카레의 원작을 드라마화한 이 작품은 1979년 유럽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분쟁이 세계 곳곳의 테러로 이어지던 시점을 소재로 가져왔다.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한 중요인사의 집이 폭탄 테러당하고 그 와중에 아이까지 희생되자, 이스라엘 모사드 고위요원인 마틴 쿠르츠(마이클 섀넌)가 작전에 투입된다. 일부 테러리스트를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또 다른 테러가 끊임없이 이어질 거라는 걸 알고 있는 마틴은 그 테러조직의 뿌리를 뽑기 위해 스파이를 투입시키려는 계획을 꾸민다. 그런데 그 스파이로서 마틴은 전문요원이 아닌 무명배우 찰리를 선택한다. 이 작전에서 필요한 건 무력이 아니라 실제적인 연기를 통한 테러조직 핵심인물과 그 본거지를 알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사망했지만 팔레스타인에서는 영웅이 된 테러리스트의 애인을 가장하기 위해 찰리는 그 역할에 빠져들고, 그 역할에 보다 몰입시키기 위해 연기선생(사실은 요원)’으로 테러리스트 역할을 대역해주는 가디 베커(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투입되면서 상황은 복잡해진다. 찰리는 심지어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더욱 역할에 몰입할 수밖에 없게 되고, 그러면서 점점 실제와 허구 사이를 혼동하는 상황에 빠진다. 진짜 테러리스트의 애인이 되기도 하고, 그 역할을 대신해주는 가디에게 빠져들기도 하면서 임무와 연기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는 것.

  박찬욱 감독은 찰리가 빠져 들어가는 연기의 세계를 실감나게 담아내기 위해 마치 그 장면 장면이 연극의 한 장면처럼 보이게 만드는 화면 구성과 미장센을 연출해낸다. 흥미로운 건 찰 리가 역할에 빠져들자 이 작전을 총지휘하는 마틴은 마치 전체를 연출하는 감독처럼 행동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박찬욱 감독은 아마도 자신의 입장을 마틴과 동일시하는 짜릿함을 느끼며 작품을 찍었을 게다.

  스파이 액션이지만, 진짜와 가짜 사이에서 정체가 드러날 위기에 놓였다 풀려나기를 반복하면서 찰리의 연기는 점점 진짜가 되어간다. 이 지점이 <리틀 드러머 걸>이 가진 연기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이다. 찰리는 진심으로 상황에 몰입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연기로 보이기도 하고 때론 진심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드라마는 이 스파이의 모험 속에서 과연 무엇이 연기이고 무엇이 진짜인가 하는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연 우리가 사는 삶은 어떨까. 그것은 오롯이 진짜 나의 삶일까. 어쩌면 그건 무수한 상황 속에서 주어지는 역할에 대한 연기의 연속은 아닐까. 우리가 그저 가짜로만 치부했던 연기가 사실은 무수히 많은 나의 또 다른 모습은 아닐까. <리틀 드러머 걸>은 연기의 세계가 어쩌면 그 누구도 직접 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삶의 가능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저 연극 무대에 서던 찰리가 어느 순간 테러 조직 깊숙이 들어가 테러리스트의 애인이 되기도 하고, 또 스파이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과연 여러분은 어떤가. 지금 어떤 역할이 주어져 있고, 그 역할을 얼마나 충실하게 연기해내고 있는가. 또 거꾸로 말하면, 당신은 어떤 역할을 하고 싶고, 그러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당신 앞에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가능성의 역할들이 놓여 있다.

 

정덕현 드라마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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